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하루하루(일상)


2022.05.17
- 5월 17일,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도 돌아가셨다, 라고 써야 하나. 
 할머니의 죽음은 예상했지만 갑작스러웠고, 할아버지의 죽음은 예상치 못했지만 담담했다.

 할아버지는 치매로 요양원에 계신 상태였다. 처음 아버지가 할아버지 근황 영상을 보여줬을 때는 살짝 충격을 받았다. 내게 할아버지는 꼬장꼬장한 훈장님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 잠깐 부모님과 떨어져서 할머니/할아버지 댁에 얹혀 산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학교에서 돌아오면 할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보고한 다음 일일 훈계를 듣고 할아버지가 나가도 된다고 하면 바로 숙제를 한 다음 나머지 시간에 놀곤 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조용하고 눈치를 많이 보는 아이였기에 그닥 혼날 일이 많지 않았지만, 동생들 중 누구라도 잘못하면 할아버지는 늘 우리 모두가 보고 듣는 앞에서 큰 소리로 호되게 혼을 냈었다. 그러면 꼭 내가 그 당사자가 아니라도 위축되게 되었고. 그래서 그 기억 때문인지 나는 항상 할아버지가 무섭고 어려웠다. 

 그 다음에 보는 할아버지는 참 웃기고 하찮은 인간이었다.

 내 앞에서는 '도리'를 그렇게 따지고 명심보감 읽어보라고 던져주던 인간이 실은 두 집 살림을 해서 혼외자까지 있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진짜 우스운 일이지. 그런 인간 주제에 뭘 그리 잘났다고 어린 나를 가르치겠답시고 훈계를 했던 걸까? 그 어린 나의 행동이 할아버지의 행동보다 훨씬 '도리'에 맞았을텐데. 그런 인간인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목 뻣뻣이 세우고 엣헴질을 해 댔던 걸까. 내가 이 사실을 안 건 성인이 다 되고 난 이후였고, 이미 그 때는 내가 친척 모임에 발길을 끊었기에 면전에 대놓고 비웃어주지 못한 게 아쉽기도 하다. 사실 이걸 알기 전까지는 좀 존경스럽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올해 만 91세셨으니, 15년 전이라 해도 만 76세셨을텐데 그 즈음에 할아버지는 컴퓨터를 열심히 배우고 계셨거든. 60대 중후반만 되어도 새로운 것에는 우선 거부감부터 갖고 '못 한다'고 손 놓는 사람들을 많이 봤는데 그 연세에도 새로운 걸 배우려고 하는 건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했으니까. 그런데 그렇던 할아버지가 영상에서는 동요에 맞춰서 몸을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만 같았다. 뭔가 그 모습을 보니 허탈한 기분도 들었다. 
 

 할머니는 모두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병원 두 군데에서 작년 말 즈음 2개월 정도 남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돌아가신 건 3월 중순이었으니 기대보다 한 달 반은 더 사시고 가신 셈이었다. 점점 식사량이 줄고 통증이 심해지면서 모두가 끝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알긴 했지만 직장암 관련 증상으로 가실 줄 알았지, 그 마지막이 코로나19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래서 난 할머니의 죽음을 대비하면서도 소식을 받았을 때는 충격을 받았다. 부고를 듣는 순간에는 생각보다 큰 상실감이 몰려왔다. 할머니와의 기억들이 날 에워싸는 기분이었다.

 반면 연세도 훨씬 많기는 했지만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리기는 했지만 연세에 비해 너무 정정했다. 그래서 난 이대로 몇 년은 더 사시겠다 싶었다. 그런데 할머니 장례가 끝나고 3주 좀 안 되었던 4월 5일, 할아버지의 코로나19 확진 소식을 듣게 되었다. 동시에 산소포화도가 80대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가 곧 돌아가시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충격은 별로 없었다. 바람을 핀 사람의 말로는 좀 고독하고 비참해도 할 말 없을텐데, 그에 비해 할아버지는 본인은 그런 기억 싹 잊고 평온하게 지내고 있지 않았던가. 

 심지어 할아버지는 생각보다도 오래 사셨다. 나는 할아버지가 산소포화도가 떨어진다는 이야기를 듣고 여명이 얼마 안 남으셨다는 예상을 했는데 내 예상보다도 한 달 반 가량을 더 사셨으니까. 물론 그 끝이 좋지는 않았지만. 폐렴으로 폐가 먼저 기능이 떨어지고 이어서 신장이 기능을 잃어갔다. 현대 의학의 놀라운 점과 무서운 점이 여기에 있다. 어지간해서는 병원에서 쉽게 죽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응급 처치를 결정할 때는 신중하게 해야 한다. 일단 호흡기가 꽂히는 순간,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시작된다. 아예 처음부터 연명 치료를 하지 않기로 한다면 모를까, 이미 시작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는 없기 때문에 할아버지는 간신히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꽤나 오래 버티셨다. 그건 본인에게도 주변인에게도 참 고문과 같은 시간들이었다. 그래서 할아버지가 중환자실에서 마침내 돌아가셨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드디어 끝이라는 생각에 안도감마저 들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 다녀오는데 기분이 참 이상하더라. 나는 할아버지에게 그닥 정이 없었는데도.....뭔가 한 시대가 끝나버린 기분이 들었다. 장례식장에서 지친 모습으로 앉아 있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는데, 이게 다음에는 내가 저 자리에 앉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뭔가 나는 아직도 다 어른이 된 것 같지 않은데 강제로 어른의 자리에 앉혀진 기분도 들었다. 



헤드윅 단상 메인덕질(뮤지컬)

0. 들어가기 전 잡설
- 최근에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팟캐스트며 음악을 많이 듣게 된다. 어제는 도서관 다녀오는 길에 오랜만에 헤드윅을 틀었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도 있고, 그에 파생된 생각도 있어서 조금 기록해 둘까 한다.

1. 헤드윅은 누구인가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도시를 두개로 분리시킨 그 장벽
냉전으로 갈라진 세상. 그 세상의 상징이 된 혐오와 증오의 베를린 장벽
욕을 했다. 더렵혔다. 침을 뱉었다.
사람들은 그 장벽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라졌다.
사라지고난 지금 우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여러분. 헤드윅이 바로 그 장벽입니다
헤드윅은 지금 그 경계선 위에서 서있습니다.
동과 서.
속박과 자유.
남자와 여자.
위와 아래.

- Tear me down에서 이츠학이 하는 나레이션의 내용이다. 이 작품을 보면 볼 수록, 그리고 들으면 들을 수록 중요한 건 '헤드윅은 지금 그 <경계선>위에 서 있다'라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그보다 더한 시간을 여자처럼 살아야 했는데, 그렇다고 또 완전히 여자는 되지 못한 몸. 아마 헤드윅 자신조차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성 저체성에 관한 분류가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헤드윅은 그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헤드윅이 여성이 되는 수술을 받은 것은 여성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베를린 장벽을 넘어가고 싶어서였지. 헤드윅은 루터조차 수단으로 여겼다. 한 번도 헤드윅은 '나는 루터를 사랑해'라거나 그에 준하는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가져다 주는 '미제' 맛을 사랑하고 그가 가져다 줄 수 있어보였던 자유를 따라갔다. 

2. 헤드윅과 이츠학 : 과거의 자신
- 헤드윅과 이츠학의 관계는 내게 퍽 흥미롭게 다가온다. 헤드윅과 이츠학은 거울상처럼 서로를 비춘다. 이츠학에게 헤드윅이 어떤 존재인지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헤드윅에게 이츠학은 명백히 '과거의 자신'이다. 인종 청소를 당할 뻔한 이츠학은 그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헤드윅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헤드윅은 이츠학에게서 동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자신을 봤다. 그래서 과거의 루터가 자신에게 남성을 가져갔듯이, 이츠학에게서 여성을 앗아가는 대가로 생존의 기회를 준다. 

 "자유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 아주 작은 것만 포기하면 돼.
 앞으로 다시는, 가발을 쓰지 않겠다고."

 헤드윅에게 이츠학은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리고 모든 버전에서 해석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헤드윅은 이츠학을 속박하고 학대하며, 동시에 집착한다. 헤드윅은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고 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성전환 수술을 받기까지 해서 동독을 탈출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그 대가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고, 파트너는 바람을 피워 떠나가고 남은 것은 트레일러 하나였다. 그런 헤드윅에게 이츠학은 어떤 존재였을까. 과거의 자신처럼 자유와 생존을 갈망하는 존재. 사람은 과거의 자신과 같은 존재를 만나면 어떻게 행동할까.

 이츠학이 굳이 헤드윅이라는 사람을 보고 자유를 달라 사정하게 된 건, 헤드윅이 '자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같은 '드랙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자신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헤드윅은 원해서 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해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헤드윅에게 이츠학은 어떻게 보였을까. 과거의 자신 같아서 내칠 수 없으면서도 증오스럽게 보이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내 자신도 내 삶도 너무 싫은데, 누군가가 내게 와서 '당신처럼 살고 싶어요!'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굳이 남자인 자신을 버리지 않고 가발을 쓰고도 무대를 휘어잡는 빛을 가진 존재를 만났다면.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에게 자유를 달라며 매달린다면. 

 헤드윅은 이츠학에게 생존을 줬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이름을-정체성을- 가지고 갔다. 자유를 준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속박했다. 루터가 자유를 대가로 헤드윅에게서 남성을 가져간 것처럼, 헤드윅은 생존을 대가로 이츠학에게서 가발을 가져간다. 나는 헤드윅이 이츠학에게 소리지르고 화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모습이 꼭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츠학을 연민하고 그에게 집착할 때, 자신을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할 수만은 없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헤드윅이 이츠학에게 가발을 가지고 간 건, 증오의 표현인 동시에 애정과 연민의 표현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헤드윅은 어쩌면 어린 한셀에게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굳이 가발을 쓰고 엄마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굳이 되고 싶지도 않은 여성이 몸이 될 필요는 없었을 거라고. 조금만 더 생각해보라고. 하지만 이츠학은 헤드윅에게는 과거의 자신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완전히 다른 인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어제 음반을 듣다가 문득 생각이 뻗어나가게 된 지점이었다.

 만약 어떤 수단으로 정말로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존재는 현재의 나와 동일한 존재인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른 존재는 아니지만 같은 존재도 아니다. 아마 특정 시점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 때의 나와 현재의 나는 대판 싸우면서 서로 '상종하지 못할 존재'라고 생각할 거다.(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내가 하는 선택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이해할지 몰라도 답답해하고 화가 날 거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나서 '나중에 넌 이러저러하게 될 거니까 지금 이렇게 해야 해!'라고 하면 과거의 나는 답답해하고 진저리를 치며 벗어나려고 하겠지. 과거의 한셀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어차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거니까 조금만 버티라고 하면 '아, 그래요?'라며 루터라는 기회를 포기할 수 있을까? 과거 병원을 퇴사하기로 한 나에게 '2~3년 정도만 더 버티면 또 다른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좀 더 힘을 내서 다녀 봐'라고 했다면, 그 때의 나는 '당장 내일 죽고 싶어서 살기 위해 그만두는 건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했겠지. 

 어느 시점부터 과거의 결정에 대해 난 거의 후회를 하지 않으려 하는 편인데, 나는 대부분 주어진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는 걸 지금은 알기 때문이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순간들조차도, 그 때로 돌아갔을 때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지금은 안다. 하지만 아직, 헤드윅은 과거의 자신을 놓지 못하고 있다.

3. 헤드윅과 토미 : Origin of Love
- 헤드윅에게 토미란 어떤 존재일까? 최소한 극 안에서 보면 헤드윅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존재가 바로 토미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계기는 우스우리만치 단순했다. 아주 작은 인정, 그게 헤드윅에게 전부가 되었다. 하긴, 사랑에 빠지는 데 뭔가 거창한 이유가 붙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하더라. 중요한 건, 헤드윅은 토미를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으로 생각했다는 거다.

나는 기억해 두 개로 갈라진 후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봤어 
널 알 것 같은 그 모습 왜 기억할 수 없을까
피묻은 얼굴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Origin of Love라는 노래는 헤드윅이 어릴 때 엄마에게 들었던 '사랑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들은 원래 하나이던 존재가 반으로 갈라진 존재이기에, 그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면 완벽한 하나, 신들도 두려워한다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헤드윅은 바로 토미가 자신에게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가 자신을 떠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반쪽이기에 마땅히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와야만 하는 존재였다. 

운명이란 없는거야
사실은 바람만 있는 하늘처럼
오묘한 마법도 없고
영원한 사랑도 없어
보이지 않는걸 찾을 순 없어

 애초에 난 헤드윅 작품 전체가 '사랑의 기원'에 관한 어린 한셀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반쪽으로 갈라지기 전부터도 우리는 붙어 있을 뿐 같은 존재였던 적이 없었다. 등이 붙어있어 서로 반대 방향을 볼 수 밖에 없던 존재였다. 서로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그저 함께 있기만 하던 존재였다. 그래서 서로 사랑도 할 수 없었다. -- '사랑 그 이전' . 이 노래를 다르게 해석해 보면 오히려 갈라졌기에 그리움이 생겼고, 갈라졌기에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갈라졌기에 같은 방향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다--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 세상에 운명도 마법도 영원한 사랑도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은 아프고 절망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홀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기에 서로에게 빛을 보낼 수도 있고, 서로의 손을 잡을 수도 있다. 우리가 결국 홀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존재에 절망하고 그대로 무너져 버릴 수도 있고, 그것을 바닥 삼아서 일어설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게도 같은 해에 그 두 가지 모두를 작품으로 만날 수 있었다.



월급루팡 공부법 하루하루(일상)

2022.04.19
- 수학에서 가장 자신 있는 건 집합이고, 역사는 늘 선사시대 구석기에 머물고, 일본어는 매번 초급에 머물고 있다.

 한 때 일본어가 재미있어서 꽤나 열심히 했는데(구몬 끝까지 갔음), 역시 언어는 안 쓰면 빠르게 잊혀지는 거라 아주 기초적인 문장 말고는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한자도 빠르게 휘발되었고. 그 당시 공부 좀 해 보겠답시고 책을 이것저것 샀는데, 그 중에는 '하루 1줄 쓰기 수첩 시리즈'가 있었다. 123권이 각 초중고급 문장을 쓰게 되어 있는데, 나는 이걸 초급 4챕터까지 하고 버려뒀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 책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거다. 

 '어차피 이거 하려고 산 건데, 어떤 형태든 하는 게 좋은 거 아닌가?'

 생각해보니 난 손을 가만히 잘 못 둬서 이야기를 하면서도 손으로는 계속해서 뭔가 의미없는 낙서를 계속하는데, 이왕 낙서하는 거 그 시간에 뭐라도 쓰는 게 좋잖아? 안 그래도 최근에 그래도 일본어 문장을 생각나는 것 하나 둘 써 보고 있는데 생각나는 문장이 별로 없다보니 영어로 치면 I am a boy, you are a girl. 수준의 문장만 끄적이고 있어서 아쉽기도 했고. 그래서 과감하게 출근할 때 한 챕터씩(5~6장) 찢어서 가지고 출근한 다음, 다 쓰고 나면 바로바로 버렸다. 어차피 이거 책으로 가지고 있어도 복습을 안 할 거는 하늘도 알고 나도 알고 이 책 저자만 빼고 모두가 알 거라서 책을 찢는다는 행위에 대한 거부감만 극복하면 꽤나 괜찮은 방법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건 생각보다 과도하게 괜찮았다.

 처음에는 한 장씩 쓰던 게, 지금은 하루에 한 챕터씩(이라고 해 봐야 5~6장 정도) 해치우고 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 쉬지 않고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도 맞는데 화장실 갈 시간조차 없이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도 문장 쓸 짬은 나더라. 게다가 회사에서 일하는 와중에 공부를 한다는 배덕감(!!)이 자극이 되어서 정말 물 한 잔 마시고 올 시간에도 머리 속으로 오늘의 문장을 계속 반복하는 효과까지....심지어 신나. 뭔가 월급 루팡질을 한다니까 이득 보는 기분마저 든다. 
 
 이대로 가면 6월 중에는 고급 표현 쓰기까지 끝날 것 같은데, 내친김에 진지하게 올 하반기에 있는 JLPT 3급 시험에 도전해 보는 것도 고려해봐야겠다. 

새로운 선생님 뚱땅뚱땅(피아노)


 어느 새 새로운 선생님과도 6주째 레슨을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 선생님의 스타일을 잘 파악하지를 못했다. 

 이전의 선생님은 우선 칭찬부터 와장창 해 주고 시작하는 스타일이다. 내가 연습이 너무너무 부족해서 속으로 부들부들 떨면서 과제 제출해도 우선은 '와! 많이 나아졌어요!!!'라고 해 주시는 스타일? 물론 그 뒤에는 '그런데....'가 붙기는 하지만. 이건 장단점이 있었는데, 우선 과제를 낼 때마다 자신감이 바닥의 바닥까지 내려가서 지구 내핵을 뚫어버릴 기세인 내게는 조금이나마 자신감을 채워줬다는 장점이 있었고, 동시에 내가 진짜 잘 하고 있는지에 대한 확신은 도리어 없어졌다는 단점도 있었다. 그렇다고 엄한 선생님이 나와 더 잘 맞았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한다. 이미 자신감이 없는 내게 질책이 돌아오면 아마 난 그만 뒀을지도 모르니까.(내가 생각해도 내가 도대체 뭘 바라는 건지...)

 새로운 선생님은.......
 .......음......

 확실히 이전 선생님에 비해 뭔가 리액션이 적다.(?) 뭔가 비교적 시크하다(??). 또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음악을 진짜 좋아하시는 거 같다.(??????) 그러니까 가끔 선생님이 레슨 중에 갑자기 자신의 세계로 가셔서 '와, 이 부분 진짜 멋지네!'라거나 'ㅋㅋ 이 부분 재미있네요'라고 하는 순간들이 있는데, 그런 순간에는 갑자기 날 뒤로 하고 선생님과 음악 둘만의 세계로 아주 잠깐 다녀오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데 이게 묘하게 마음이 편하다. 과제 피드백이 툭툭툭 '여기 이렇게 수정하시고, 이 부분은 저렇게, 여긴 그렇게 하는 게 좋아요,'라고 짚어주시는 식으로 가는데, 정말 정신 안 차리면 후루룩 넘어가서 이전 선생님에 비해 레슨을 들을 때 긴장하게 되는 면이 있다. 이전 선생님은 상대적으로 좀 마음 편하게 레슨을 들을 수 있었다. 따로 필기를 하며 듣기는 했지만, 그걸 또 다 악보에 표시해 주셔서 조금 놓치더라도 선생님의 강의 노트(?)를 보면서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이번 선생님은 정말 '이게 동영상이라 다행이야...'라고 생각하게 될 만큼 휘릭휘릭 넘어가는 게, 딱 어릴 때 학원 레슨을 받던 느낌이다. 그러니까 들을 때는 알겠는데, 보고 나면 '내가 뭘 들었지...?'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이 느낌이 참 마음이 편하다. 본 투 비 아싸인 나에게는 상대적으로 좀 슬쩍 뒤로 빠져 있는 느낌이 묘하게 안정감을 줘서....

 과제 스타일도 두 선생님이 다른데, 이전 선생님은 세부적인 과제를 많이 내주시는 편이었다. 예를 들어 새 곡을 들어간다 치면 'nn마디까지 1. 왼손 2. 오른손 3. 양손' ...이렇게 과제가 나온다거나 'nn~mm 마디까지는 붓점, 뒷붓점' 같은 부분 연습 과제도 많아서 많을 때는 촬영해야 하는 과제가 6개쯤 될 때도 있었는데, 이번 선생님은 그냥 쿨하게 '어떻게든 할 수 있는 데까지'.......뭐 이런 느낌이랄까.(그래서 늘 과제 영상이 하나였음) 그래서 오히려 더 한계까지 해 가는 것도 있다. 

 상대적으로 이전 선생님은 이제 막 피아노를 시작하는 사람들이나 정말 오랜만에 치는 사람들에게 보다 강점이 있다면, 이번 선생님은 어느 정도 악보도 혼자 볼 줄 알고 칠 줄도 아는 학습자에게 맞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건 어쩌면 그냥 내가 피아노 복귀 유저일 때 만난 저번 선생님은 그에 맞게 레슨을 해 주신 거고, 지금 선생님은 지금의 내게 맞게 레슨을 해 주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L.Schytte : Modern Etudes op.68, no.9 - 완전히 새로운 곡 뚱땅뚱땅(피아노)

2022.04.13
- 새로운 선생님과의 레슨은 뭔가 스피디하다. 아무래도 내가 일부러 짧은 곡들 위주로 선정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여기 포스팅하지는 않았지만, 그 새 바흐 인벤션 8번이 끝나고 헨델-할보르센의 '파사칼리아'도 2주만에 끝내고 새로운 곡으로 넘어왔다.

 이 곡의 선정은 좀 우연한 계기로 이뤄졌다. 헨델-할보르센 '파사칼리아'의 두 번째 레슨 때 과제로 '다음 곡'이라는 문구를 회사에서 본 게 이 곡 선정에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이다. 파사칼리아 2주차 과제를 보내면서 어쩌면 이번 주가 이 곡 마지막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은 했으면서도 막상 레슨 과제로 '다음 곡'이라는 문구를 보니 머리가 멍해졌다. 다음 곡으로 뭘 해야 할지 정말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건 모차르트가 준 트라우마같다. 어떻게든 해 냈지만 k.332 연습할 때 너무 고생하고 힘들었던 기억이 쉬이 다음 곡에 도전하는 걸 무서워하게 만들기도 해서 이후 내가 모아 놓은 '언젠가는 치고 싶은 곡' 악보를 죄다 마음 속에서 폐기하게 만들었으니까. 

 아무튼 뭔가 정하긴 해야 했다. 게다가 최대한 빨리. 새 곡을 익힐 때는 주말 내 빡센 연습이 필요하다. 하던 곡이면 주말에 좀 놀아도 퇴근 때 조금씩 연습하는 걸로 어떻게든 비빌 수 있지만 새 곡 익히는 데는 시간이 무시무시하게 들어가기 때문이다. 우선 이 날 안으로 어떻게든 새 곡을 확정하기는 해야 했으니, 선생님께도 곡 선정을 부탁드려 놓은 채로 나도 퇴근길에 계속 탐색해 보기 시작했다. 되는 대로 '초보자 피아노' '초보 레파토리' 등등으로 검색해보다가 유튜브 알고리즘의 선택으로 이 곡을 듣게 되었다. 




 어? 이거 괜찮은데? 내가 좋아하는 분위기에다가 멋지고 웅장한 느낌까지! 게다가 연주 시간이 1분 남짓이니 내가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는 적당한 시간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동영상 제목이 '콩쿠르 곡집'이라고 하면, 출판된 악보가 있을 테니 프린터가 없더라도 악보를 사 오면 된다. 제일 좋은 점은 내가 듣도 보도 못한 작곡가의 악보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종종 클래식을 들었다고 해도 매번 내가 음반을 선택해서 듣는 것이다 보니 늘 듣던 작곡가들의 곡을 선택하게 되고, 곡을 선정할 때도 내가 학원에서 귀동냥이나마 해 본 곡들이나 내가 잘 알고 있는 곡 위주로 선정하게 된다. 그러다보니 뭔가 '새로움'에 대한 욕구가 있었는데, 그것도 충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 곡으로 하기로 했다. 참고로 이 곡을 찾다가 알게 된 건데, 캐나다에 피아노 곡의 난이도를 측정하는 RCM level이라는 게 있다고 하며, 이 곡은 그 중에서도 7레벨의 곡이라고 한다. 얼마 전에 친 바흐 인벤션 8번이 같은 7레벨의 곡이었으니 그걸 할 수 있었으면 이 곡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의욕이 넘쳐 버렸다......

 새 곡을 익힐 때면 늘 신나지만, 이 곡은 애초에 내게 익숙한 곡도 아니어서 '어떻게 쳐야 한다'는 그림 자체가 없다 보니 정말 어릴 때처럼 악보를 익혀 가면서 곡을 파악해가야 했는데, 그게 힘들기는 해도 정말 재미있었다. 역시나 초견이 부족한데다가 화음이 많이 나와서 손이 마음대로 안 움직여져서 양손 맞출 때는 두 마디 연습하고 다시 한 마디 붙이고 붙이고 붙이는 식으로 정말 한 땀 한 땀 진행해야 했지만 내가! 내가!! 4일 안에 완곡을 한 것이다!!!(만세!!) 원래는 한 페이지 정도만 해서(20마디 내외) 제출하려고 했는데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고 의욕을 내다 보니 레슨 영상 촬영하는 날 연습 제대로 안 했던 마지막 까지 어떻게든 쳐 내는 쾌거를 거뒀다.(영상 막바지에 좀 우물쭈물하는 건 연습 제대로 안 하고 바로 쳐서 그런 것....)




 이 곡을 하면서 확실히 느낀 게 있다. 너무 욕심 내지 말고 내 수준에 맞는 곡을 하나 하나 하면서 그냥 즐겁게 치자는 거. 
 아무리 좋은 곡이라도 너무 내 수준에 비해 높은 곡이라면 어떻게든 해 내더라도 그 과정에서 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결국 번아웃이 온다는 거. 

 당분간은 이렇게 짧고 새로운 곡 위주로 레파토리를 선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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