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기 전 잡설- 최근에 걷기 운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데, 그러다보니 팟캐스트며 음악을 많이 듣게 된다. 어제는 도서관 다녀오는 길에 오랜만에 헤드윅을 틀었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도 있고, 그에 파생된 생각도 있어서 조금 기록해 둘까 한다.
1. 헤드윅은 누구인가
1961년 8월 13일 베를린. 도시를 두개로 분리시킨 그 장벽
냉전으로 갈라진 세상. 그 세상의 상징이 된 혐오와 증오의 베를린 장벽
욕을 했다. 더렵혔다. 침을 뱉었다.
사람들은 그 장벽이 영원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사라졌다.
사라지고난 지금 우린.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여러분. 헤드윅이 바로 그 장벽입니다
헤드윅은 지금 그 경계선 위에서 서있습니다.
동과 서.
속박과 자유.
남자와 여자.
위와 아래.
- Tear me down에서 이츠학이 하는 나레이션의 내용이다. 이 작품을 보면 볼 수록, 그리고 들으면 들을 수록 중요한 건 '헤드윅은 지금 그 <경계선>위에 서 있다'라는 문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로 태어났지만 그보다 더한 시간을 여자처럼 살아야 했는데, 그렇다고 또 완전히 여자는 되지 못한 몸. 아마 헤드윅 자신조차도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채 살아가고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요즘에는 성 저체성에 관한 분류가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헤드윅은 그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인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헤드윅이 여성이 되는 수술을 받은 것은 여성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베를린 장벽을 넘어가고 싶어서였지. 헤드윅은 루터조차 수단으로 여겼다. 한 번도 헤드윅은 '나는 루터를 사랑해'라거나 그에 준하는 감정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가 가져다 주는 '미제' 맛을 사랑하고 그가 가져다 줄 수 있어보였던 자유를 따라갔다.
2. 헤드윅과 이츠학 : 과거의 자신
- 헤드윅과 이츠학의 관계는 내게 퍽 흥미롭게 다가온다. 헤드윅과 이츠학은 거울상처럼 서로를 비춘다. 이츠학에게 헤드윅이 어떤 존재인지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헤드윅에게 이츠학은 명백히 '과거의 자신'이다. 인종 청소를 당할 뻔한 이츠학은 그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어 헤드윅을 붙잡았다. 그리고 그 순간, 헤드윅은 이츠학에게서 동독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자신을 봤다. 그래서 과거의 루터가 자신에게 남성을 가져갔듯이, 이츠학에게서 여성을 앗아가는 대가로 생존의 기회를 준다.
"자유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 아주 작은 것만 포기하면 돼.
앞으로 다시는, 가발을 쓰지 않겠다고."
헤드윅에게 이츠학은 과거의 자신이었다. 그리고 모든 버전에서 해석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헤드윅은 이츠학을 속박하고 학대하며, 동시에 집착한다. 헤드윅은 과거의 자신을 후회하고 있을까. 아마 그랬을 것이다. 성전환 수술을 받기까지 해서 동독을 탈출하지만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며 그 대가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고, 파트너는 바람을 피워 떠나가고 남은 것은 트레일러 하나였다. 그런 헤드윅에게 이츠학은 어떤 존재였을까. 과거의 자신처럼 자유와 생존을 갈망하는 존재. 사람은 과거의 자신과 같은 존재를 만나면 어떻게 행동할까.
이츠학이 굳이 헤드윅이라는 사람을 보고 자유를 달라 사정하게 된 건, 헤드윅이 '자신과 같은' 존재라고 생각해서였을지도 모른다. 자신과 같은 '드랙퀸'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 그러니까 자신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했을지도. 하지만 헤드윅은 원해서 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해서 그런 삶을 살고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런 헤드윅에게 이츠학은 어떻게 보였을까. 과거의 자신 같아서 내칠 수 없으면서도 증오스럽게 보이지 않았을까. 나는 지금 내 자신도 내 삶도 너무 싫은데, 누군가가 내게 와서 '당신처럼 살고 싶어요!'라고 한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굳이 남자인 자신을 버리지 않고 가발을 쓰고도 무대를 휘어잡는 빛을 가진 존재를 만났다면. 그런데 그 사람이 자신에게 자유를 달라며 매달린다면.
헤드윅은 이츠학에게 생존을 줬다. 그리고 그 대가로 이름을-정체성을- 가지고 갔다. 자유를 준 것처럼 보이지만 철저히 자신에게서 벗어날 수 없게 속박했다. 루터가 자유를 대가로 헤드윅에게서 남성을 가져간 것처럼, 헤드윅은 생존을 대가로 이츠학에게서 가발을 가져간다. 나는 헤드윅이 이츠학에게 소리지르고 화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그 모습이 꼭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츠학을 연민하고 그에게 집착할 때, 자신을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미워할 수만은 없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난 헤드윅이 이츠학에게 가발을 가지고 간 건, 증오의 표현인 동시에 애정과 연민의 표현이었을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헤드윅은 어쩌면 어린 한셀에게 말하고 싶었을지 모른다. 굳이 가발을 쓰고 엄마 옷을 입지 않아도 된다고. 굳이 되고 싶지도 않은 여성이 몸이 될 필요는 없었을 거라고. 조금만 더 생각해보라고. 하지만 이츠학은 헤드윅에게는 과거의 자신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완전히 다른 인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어제 음반을 듣다가 문득 생각이 뻗어나가게 된 지점이었다.
만약 어떤 수단으로 정말로 '과거의 자신'을 만날 수 있다면 그 존재는 현재의 나와 동일한 존재인가?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른 존재는 아니지만 같은 존재도 아니다. 아마 특정 시점의 과거로 돌아간다면, 그 때의 나와 현재의 나는 대판 싸우면서 서로 '상종하지 못할 존재'라고 생각할 거다.(이건 추측이 아니라 확신이다.) 과거의 나는 현재의 내가 하는 선택의 상당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겠지.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내가 왜 그렇게 행동하는지는 이해할지 몰라도 답답해하고 화가 날 거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나서 '나중에 넌 이러저러하게 될 거니까 지금 이렇게 해야 해!'라고 하면 과거의 나는 답답해하고 진저리를 치며 벗어나려고 하겠지. 과거의 한셀에게 조금만 기다리면 어차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거니까 조금만 버티라고 하면 '아, 그래요?'라며 루터라는 기회를 포기할 수 있을까? 과거 병원을 퇴사하기로 한 나에게 '2~3년 정도만 더 버티면 또 다른 기회가 올지도 모르니까 지금은 좀 더 힘을 내서 다녀 봐'라고 했다면, 그 때의 나는 '당장 내일 죽고 싶어서 살기 위해 그만두는 건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느냐'고 했겠지.
어느 시점부터 과거의 결정에 대해 난 거의 후회를 하지 않으려 하는 편인데, 나는 대부분 주어진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는 걸 지금은 알기 때문이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던 순간들조차도, 그 때로 돌아갔을 때 똑같은 선택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지금은 안다. 하지만 아직, 헤드윅은 과거의 자신을 놓지 못하고 있다.
3. 헤드윅과 토미 : Origin of Love
- 헤드윅에게 토미란 어떤 존재일까? 최소한 극 안에서 보면 헤드윅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존재가 바로 토미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계기는 우스우리만치 단순했다. 아주 작은 인정, 그게 헤드윅에게 전부가 되었다. 하긴, 사랑에 빠지는 데 뭔가 거창한 이유가 붙는 경우는 거의 없긴 하더라. 중요한 건, 헤드윅은 토미를 자신의 '잃어버린 반쪽'으로 생각했다는 거다.
나는 기억해 두 개로 갈라진 후
너는 나를 보고 나는 너를 봤어
널 알 것 같은 그 모습 왜 기억할 수 없을까
피묻은 얼굴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일까
Origin of Love라는 노래는 헤드윅이 어릴 때 엄마에게 들었던 '사랑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이다. 우리들은 원래 하나이던 존재가 반으로 갈라진 존재이기에, 그 잃어버린 반쪽을 찾으면 완벽한 하나, 신들도 두려워한다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헤드윅은 바로 토미가 자신에게 그런 존재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가 자신을 떠난 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반쪽이기에 마땅히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와야만 하는 존재였다.
운명이란 없는거야
사실은 바람만 있는 하늘처럼
오묘한 마법도 없고
영원한 사랑도 없어
보이지 않는걸 찾을 순 없어
애초에 난 헤드윅 작품 전체가 '사랑의 기원'에 관한 어린 한셀의 해석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반쪽으로 갈라지기 전부터도 우리는 붙어 있을 뿐 같은 존재였던 적이 없었다. 등이 붙어있어 서로 반대 방향을 볼 수 밖에 없던 존재였다. 서로를 한 번도 보지 못하고 그저 함께 있기만 하던 존재였다. 그래서 서로 사랑도 할 수 없었다. -- '사랑 그 이전' . 이 노래를 다르게 해석해 보면 오히려 갈라졌기에 그리움이 생겼고, 갈라졌기에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볼 수 있었고, 갈라졌기에 같은 방향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의 시작이었다--이렇게도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 이 세상에 운명도 마법도 영원한 사랑도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것은 아프고 절망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렇게 홀로 오롯이 존재할 수 있기에 서로에게 빛을 보낼 수도 있고, 서로의 손을 잡을 수도 있다. 우리가 결국 홀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존재에 절망하고 그대로 무너져 버릴 수도 있고, 그것을 바닥 삼아서 일어설 수도 있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게도 같은 해에 그 두 가지 모두를 작품으로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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