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 작: 류드밀라 라쥬몹스까야 / 번역, 연출: 최범순
- 일시 : 2007. 11. 14
- 소극장 '축제'(대학로)
- 캐스팅 : 엘레나 세르게예브나 (박현미), 발로쟈 (장준호), 빠샤 (서제광), 비쨔 (김영조), 랼랴 (박수민) : 연극으로 만나서 다행이었다. 만약 내가 이것을 희곡으로 만났더라면, 이 작품을 소설로 만났더라면, 이 작품을 영화로 만났더라면 난 이미 중반에서 덮어버리거나 꺼 버렸을 것이다.
이 작품이 별로냐고? 아니다. 정말 괜찮은 작품이다. '취향'이 아니냐고? 글쎄... 뭐, 이런 분위기가 내 취향이 아닌 것은 사실이나 이 작품이 내 취향이 아니라고 말하긴 상당이 꺼려진다. 꼭 '논어는 별로 내 취향의 작품이 아니더라.'라거나 '성경을 읽어보긴 했는데 별로 내 취향은 아니더라'라고 말하는 기분이 들어서.
내용은 굉장히 단순하다. 수학선생님인 엘레나 세르게에브나의 집에 네 학생들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감동적이고 단순한 깜짝 생일파티로 시작한다. 그러나 학생들은 곧 모습을 바꾸어 그 날 시험을 본 수학시험 답안지가 있는 안전금고의 열쇠를 내 놓으라고 한다. 절대 열쇠를 내 줄수 없는 선생님과 열쇠를 얻으려는 학생들은 서로 대립하기 시작한다는 내용. 이게 전부다.
저 어두운 포스터,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이라는 정상적인 제목에서 풍기는 비정상적인 분위기에 이끌려 보러 갔다가 굉장히 묘한 기분으로 터벅터벅 걸어나왔다. 안 그래도 48시간 동안 제대로 잔 시간은 불과 4~5시간 정도인 상태에서 보러 간 건데, 이 연극은 그나마 내게 남아있던 힘을 쭉 빼앗아 가서 정말 대학로에서 기숙사로 살아 돌아갈 수는 있는 건지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였다.
이 연극의 매력은 대사와 배우들의 연기다. 두 시간여를 넘는 동안 쉴새없이 휘몰아치는 대사는 한 구절 한 구절이 무겁게 다가온다. 그것을 표현하는 배우들도 대단해서, 그 순간은 정말 그 사건이 되풀이 되고 되풀이 되는 듯하다. 연극이 진행되는 내내 긴장해 있고, 심각해져서 단 한 순간도 웃을 수가 없었다.
사건은 단순하다. 시험지가 든 금고. 그 열쇠를 가지고 있는 선생님.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모인 아이들.
관객은 때론 선생님의 입장에서, 때론 아이들의 입장에서 그 극을 보게 된다. 열쇠를 줄 것인가 말 것인가? 어떻게 열쇠를 얻어내야 할 것인가. 무섭게 부딪히는 가치관을, 서로 부딪히면서 무너져 가는 자신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이 연극에는 두 진의 중심에 서 있는 두 사람과 그 사이에 서 있는 세 사람이 나온다. 도덕과 정의, 인간에 대한 신뢰를 외치는 엘레나 선생님과 그 극단에 서 있는 절대악, 발로쟈. 그리고 랼라, 빠샤, 비쨔이다.
"우리 시대에 옷은요. 더 나은 세계로 가기 위한 통행증이거든요."
- 넌 언제까지 그렇게 기생해서 살 거니?
" 왜 날 끌어주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뒤따라가면 안 되는 거죠? 선생님, 전요 엄마처럼 살지 않기 위해 계산하고 또 계산해야 해요. 앞으로 내딛는 발 한 걸음 한 걸음까지 계산하고 내딛어야만 한다고요. 아시겠어요? 처녀도 마찬가지예요. 계산해서 가능한 한 비싸게 팔아야죠." 랼라. 네 명의 학생 중 유일한 여자. 빠샤의 여자친구이다. 무섭게 대들기는 해도 그녀는 가장 엘레나 선생님에게 가까운 인물이다. 자신의 가난을 벗어나고 싶어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비열해져야 하고 모든 것을 계산해야 한다고는 하지만, 계속해서 친구들을 설득하고 엘레나 선생님에게 차라리 열쇠를 빨리 내어주라고 사정한다.
"우리가 위선적이고 비열한 놈들이라면, 그건 당신들이 그랬기 때문이예요. 존경하는 엘레나 선생님, 우린 당신들의 피가 이어진 자식입니다. 양자가 아니라요. 당신이 우리를 낳았다고요!" 빠샤는 양 극단에서 보다 발로쟈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악'이 되지 못한다. '신은 자유를 주셨죠. 선과 악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요.'라고 말하지만, 그는 끝내 악을 선택하지 못한다. 나약하고 우유부단한 녀석. 발로쟈의 곁에 끝까지 남아 있지만, 결국 선을 넘지는 못한다.
"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어요. 결국 목을 매고 죽었죠."
".... 선생님 죄송해요. 선생님 죄송해요. 제가 이거 다 치울께요." 비쨔. 발로쟈의 말에 의하면 '사회에 꼭 있곤 하는 쓰레기'같은 존재. 처음에는 강한 척 하지만 가장 약한 인물이다. 사실 다섯 캐릭터 중 가장 이질적인 캐릭터이기도 하다. 모두가 각자의 주장과 자신의 가치관을 걸고 싸우거나 혼돈을 겪지만, 비쨔의 가장 큰 문제는 '시험지' 그 자체이다. 그의 행동은 단순하고 생각도 단순하다.
"힘이요. 상황을 자유롭게 움직일 줄 아는 능력, 타인들의 운명이 내 손 안에서 떠는 것을 느끼는 능력이요. 전지전능한 존재로써 자신을 느끼는 것!" 발로쟈. 그는 절대'악'이다. 스스로 악이 되기를 선택한 인물이고, 철저한 논리와 공격으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스스로를 '이아고'라고 칭하는 사람이기도 하고. 학생들이 엘레나 선생님을 찾아가도록 뒤에서 부추긴 인물이지만, 정작 그는 시험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에 맞게 다른 사람들을 '굴복' 시키는 것이고, '파워게임'을 즐기는 것이다. 그런 만큼 엘레나와 가장 크게 대립하면서 이 극을 이끌어 나간다. 가장 인상깊은 연기를 보여준 캐릭터이기도하다. 엘레나가 점차 발로쟈에게 무너져가는 것처럼, 그의 말을 듣노라면 순간순간 나도 흔들리더라고. 그 만큼 그의 힘은 굉장하다. 그는 성공을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 어떠한 방법이라도 동원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상식'이라든지 '양심'이라는 말은 그에게 비웃음거리일 뿐이다. 그만큼 무섭고 소름끼치는 인물이다.
이 연극은 많은 것을 남긴다. 이름붙이기 힘든 것들을 정말 많이 남겼다. 그래서일까. 이 연극을 보고 삐걱거리며 돌아가던 내 생각의 톱니바퀴는 멈춰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