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kyll & Hyde- 일시 : 2008.12.3 8PM
- 장소 : LG 아트센터
- 캐스팅 : 홍광호(지킬), 김선영(루시), 김소현(엠마), 김봉환(덴버스경), 류창우(어터슨), 이영기(주교), 강상범(새비지/풀), 박인배(스파이더/스트라이드), 양정열(글로솝 장군), 김호(프룹스), 유채정(비스콘필드/기네비어), 남자 앙상블(이승원-신문팔이-,황세준,문상현,조강현,최세용,최현덕), 여자 앙상블(이호정,최고운,최혜림,선영,김여진,고효진)
- 연출 : David Swan
- 음악감독 : 원미솔 (Jekyll & Hyde(08.12.03) part1에서 이어집니다.)
> 날 어린아이로 생각지 마요 Vs 시작해 새 인생
: 스트라이드와 엠마를 볼 때면 좋은 옆집 오빠와 그 오빠의 사랑스런 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스트라이드에게는 불행이겠지만, 엠마에게 스트라이드는 벗어나야 할 아버지와 가정과 같은 이미지의 존재가 아닐까? 극복해야 할 존재 말이다. 어른이 되기 위해 벗어나야 할 틀. 스트라이드는 엠마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주지만, 엠마에게 스트라이드는 연인이라기보다는 가족과 같은 느낌이었겠지. 겉으로 보기에 이런 귀족 영양인 엠마는 온실 속 화초처럼 약해 보이고, 뒷골목에서 살아가는 창녀 루시는 거칠고 강해보인다. 그러나 실상은 반대로, 엠마는 굉장히 강인했고, 루시는 한없이 약했다.
처음 지킬을 알았을 때, 난 엠마를 순진한 귀족 아가씨로 오해했었다. 보호받아야 할 존재로. 스트라이더에게 엠마가 바로 그런 존재이지 않았을까? 그래서 끊임없이 배려해주고 챙겨주고, 감싸주려했겠지. 하지만 엠마는 내면이 참 강하고, 언제라도 홀로 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왜 지킬을 선택했을까? 그녀의 주변에 있던 남자들 중 유일하게 그녀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해줬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에게 필요한 건 자신을 꼭꼭 감싸서 보호해 줄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믿고 응원해 줄 수 있는 존재였을터이다. 자신과 같은 눈높이에서 같은 곳을 바라볼 수 있는 존재말이다. 착한 아이였던 엠마에게 아버지인 덴버스경이나 자신을 아껴주는 스트라이드는 무척 소중하고, 사랑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그녀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있는 존재는 아미었다. 자유롭고 강인한 존재, 무대에서 본 엠마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그녀는 어떤 면에서 지킬과 꼭 닮아 있었고, 오히려 지킬보다 성숙한 존재였다. 자신보다 나이도 많은 귀부인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고, 자신의 불안을 달래면서 끊임없는 믿음을 줄 수 있는 사람. 꼿꼿하게 편 등에서 그녀의 곧은 성격이 보였다. 아마 그녀는 하이드에게 살해당했더라도 죽는 그 순간까지 지킬을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었을거라 생각한다.
그에 비해 루시는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로 보인다. 억척스럽게 살아가고는 있지만, '아무도 날 알지 못한다.'면서 한숨을 토해내는 존재이기도 하고(아마 그녀 자신도 자신이 누군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냥 친구'가 되겠다는 지킬의 한 마디에 흔들리며 그를 사랑하게 되고 만다. 자신을 때리고 물건으로밖에 취급하지 않는 스파이더와 마담, 그냥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아가씨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루시에게 세상은 얼마나 어둡고 차가웠을까. 그러니 그 작은 온기에 자신의 모든 존재를 걸고, 또 거는, 상처받을 것을 뻔히 알면서도 사랑에 매달리게 되었겠지.
이번엔 다를 거라 믿었어, 이번엔....
힘들던 지난 시절 떠올라
절망 속에 아픈 기억들.
이제는 알 것 같아, 세상을, 이제는.... 그렇게 배신을 당하고서도 그녀는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잠자는 공주같다. 누군가가 이 생활을 끝내줄 거라 믿고 기다리는 불상한 공주님.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에 넘어가버리고, 자신을 욕망한다는 것 때문에 내심 하이드에게 끌리고 마는, 여자, 루시. 그래서 난 항상 그녀가 죽을 것을 알면서도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그녀는 정말로 평범한 여자니까.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상처받으면서도 사랑하고, 결국 상처받으면서도 다시 꿋꿋하게 일어나는 강인한 그녀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 역시 그런 여자인것을. 김선영씨의 루시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이 아니었을거라 생각한다. 강한 자아가 있었지만, 그녀가 자각을 하지 못했을 뿐이다. 떠나라는 지킬의 편지를 통해 이제 자신은 더 이상 꿈꿀 수 있는 공주님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비로소 '살아가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두 다리로 땅을 딛고 일어선 인간의 모습을 보았다.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이 넘어지고 까지고 피 흘려도 일어서는 빛나는 모습을 보았다.
보잘것은 없다해도 내 삶
내 스스로 감당해야 할 내 삶 이 루시는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막노동을 해서라도, 노점상을 해서라도 살아남아 앞으로 걸어나갈 수 있었는데, 다만 그 자각이 너무 늦어버렸을........뿐. 그래도 난 그렇게 약하고 그렇게 강한 그녀가 좋다.
> 어쨌거나 계속되는 삶
: 무대를 통해 극을 만날 때 좋은 점 중 하나는 미처 보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무대 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서 '아, 이 사람들에게도 삶이 있었지!'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고나 할까. 지킬을 직접 눈 앞에서 보면서, 배경이 영국이라는 것이 확 다가오기도 했고 말이다. 작품 전체를 감싸는 축축하고 답답한 런던의 안개가 느껴지는 듯 했다. 이런 무대를 만들어준 큰 역할은 주연 뿐 아니라 조연들과 앙상블의 힘일터이다.
저번 공연을 보지 못해서 비교는 할 수 없지만, 역시 무대를 통해 직접 보는, 무대 위에서 삶을 만들어가는 분들의 모습에 감동하지 않기가 힘들었다. 부분부분 아직 거친 면이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 소소한 단점들을 모두 상쇄하고 남을 만큼 공연은 멋지고, 감동적이었다. 눈에 띄는 분들도 많았고.(다만 알아보지 못하는 내 안면인식기능장애를 탓할 수 밖에...)
무대 위에는 삶이 있었고, 난 또다시 그 삶에 매료되고 말았다.
(기타 못하단 이야기들)
- 한 배우에 대한 생각은 그 배우의 다른 작품을 보면서 깨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그것이 좋은 충격이든 나쁜 충격이든 말이다.) 저번 노트르담 드 파리를 통해 알게 된 류창우씨의 경우 지킬을 통해서 새롭게 발견하게 된 것들이 있는데, 이 분은 굉장히 기본에 충실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작품을 접하면서, 특히 대극장 작품인 경우, 가사의 70~80% 정도만 알아들어도 꽤나 잘 알아들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문제인 걸까? 난 한 번도 라이센스 뮤지컬을 접하면서 가사의 100%를 알아들은 적이 없었거든. 그게 귀를 폼으로 달고 다니는 나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적절한 가사나 배우의 역량에 따라 알아듣는 정도는 큰 차이를 보인다. 우션 딕션이 제대로 안 되면, 음악이 좋거나 가사가 좋아도, 듣는 사람으로서는 답답할 수 밖에 없다. 미리 가사를 알고 가는 경우나 그것이 무슨 내용인지 아는 경우가 아니라면, '도대체 뭔 말을 하고 있는 거야?'라면서 조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으니까 말이다.(전후 상황을 통해서 대강 알아듣긴해도...)
그런 점에서 류창우씨는 굉장히 딕션이 좋으시더라. 그래서 듣는데 답답하지가 않고 시원하다. '기도하네' 사중창에서 류창우씨 부분만은 비교적 또렷하게 들려와서 속으로 적잖이 감탄했다. 성량도 시원시원하시고.
- 그리고 이 분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지(웃음). 무대를 보기 전부터 내가 더 떨렸던 이유의 일부는 아마 스트라이드/스파이더 역의 박인배씨였을 것이다. R님을 통해 알게 된 찬스라는 작품에서 처음 뵙고, 어쩌다보니 지금까지 무대를 지켜보고 있는 젊은 배우님. 앞으로 잘 되기를 바라는, 노력하는 배우님. 이번 지킬&하이드는 이 분의 첫 대극장 작품이고, 아마 그 분에게 온 가장 큰 기회일테니까. 이제껏 말은 못 했지만, 좀 힘들더라도, 조금....상처를 받을지는 몰라도 큰 기획사를 만나 큰 무대에서 아주 작은 역이라도 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랬던지.(이런 걸 보면 난 팬의 자격도 없지...) 내가 이 분에게 관심을 가지게 된 건 그 연기나 노래보다도 무대를 향한 마음 때문이었으니까.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내심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여기에는 차마 써 놓지 못하는 이야기들, 그 분 앞에서는 할 수 없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은지!) 이 분에 대한 감정은 조금은 복잡해서, 그냥 단순한 팬이라기보다는....윽, 조금 무례한 말일지는 몰라도 꼭 점점 커 나가는 존재를 지켜보는 느낌이랄까. 조금은 서툴던 존재가 어느 새 멋진 존재가 되어가는 것을 보는 느낌.
그리고 만난 무대에서는 정말 내 걱정이 그저 기우였을 뿐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내가 생각하는 스파이더/스트라이드와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자신만의 역을 조금씩 찾아나가고 발견해나가는 모습이 좋았다. 처음에는 스파이더보다는 스트라이드쪽이 그 분에게 더 잘 맞는 것처럼 보였었다. 엠마를 진심으로 아껴주는 오빠같은 다정한 모습은 보기만해도 슬며시 웃음이 나왔는데, 루시에게 잔혹하게 하는 면은 조금 부족해 보였거든. 그런데 와, 2막의 스파이더 facade 솔로 부분에서 낮게 깔려오는 목소리에 섬찟, 소름이 돋더라. 잠깐 풀어진 집중력에 찬물을 확 끼얹는 듯한 느낌이었다. 오오, 어쩌면 이 배우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존재가 될지 모른다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굉장한 사람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멀리 멀리 나아가세요. 아주 멀리요. 전 끝까지 객석에서 당신을 응원하겠습니다. 참으로 행복한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제게 더 큰 행복을 주리라 확신합니다. 전 믿어요. 배우가 무대를 포기하지 않는 한, 배우가 관객을 포기하지 않는 한, 무대와 관객은 그 배우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