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 일시 : 2008.12.5, 8PM
- 장소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 캐스트 : 노주현(테비에), 이미라(골데), 방진의(자이틀), 김재범(모틀), 해이(호들), 이경수(페르칙), 김정미(하바), 정현철(피에드카), 박란주(슈프리쩨), 이슬(비엘케), 함건수(라자르 울프), 이흥구(랍비), 김광혜(옌떼), 박선주(샨들), 나정숙(자이틀 할머니), 오은미(프루마 사라), 정연주(마마스), 이상준/민경현/박성호(파파스), 진상현(멘들), 김경열/김명일/이창선/박우식(유태인들), 배준성/정재헌/유기호/신상민(러시아인들), 김준태(나훔), 김보경/배지혜/이지현(딸들), 정광영(관리), 정덕근(피들러), 정덕근(클라리넷 솔로), 조찬희(어린 피들러)
- 지휘자 : 이영애/악장 : 이소진
> 황혼의 땅, 아나테프카 : 살아있는 게 가능할 것 같지 않을 정도로 추운 겨울밤이었습니다. 차가운 바람을 겨우겨우 뚫고 허겁지겁 달려가 공연장에 들어선 순간, 제 눈에 보인 무대 위에도 겨울이 있었습니다. 얼어붙은 땅 위의 아나테프카는 어딘가 쓸쓸한, 황혼의 마을입니다. 하지만 이제 곧 다가올 차가운 밤이 오기 전의 마지막 온기를 가지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지요. 겨우 한두장의 나뭇잎만이 남아있는 쓸쓸한 나뭇가지가 간신히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곳. 그리고 그 마을에마 만난 이야기에 전 전율, 네, 오랜만에 무대를 보며 전율했습니다. 심장이 오그라들고 세포가 떨리는 전율을 느꼈어요. 어떻게 이 감각을 표현해야 할 지 모를 정도로요. 전 이 작품을 영화로도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극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대해서도 잘 알지 못했지만 감동을 받는데는 아무런 영항을 주지 못했습니다. 아니, 이 이야기를 무대를 통해 처음 접했기에 이렇게 큰 충격을 느꼈는지도 모르겠어요.
<Act 1>
1. Tradition : 아무런 소리 없이 어두운 무대 속에 사람들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그들의 모습은 어쩐지 음침하고 무서워보기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청아하고 매끄러운 바이올린 선율과 함께 어슴프레 마을에 빛이 들기 시작하고, 곧 그 선율은 우리를 러시아의 한 작은 마을, 아나테프카로 데려다줍니다. 그래요, 이 극은 유태인 마을, 아나테프카에 사는 가난한 우유장수 테비에와 그 딸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아나테프카는 아름다운 마을입니다. 모두가 전통을 지키고 있는 마을이고, 그 마을에서는 모두가 필요한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매쟁이 옌떼 할머니는 각 집집을 돌아다니며 혼담을 맺는데 열을 올리고 거지인 나훔도 그 마을에 있어서는 자신의 위치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어요. 마을에 딱 한 분 계시는 랍비님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이 마을의 모습, 그리고 일상 모두가 이 한 곡에 녹아들어가 있습니다. 답답할 정도로 전통을 지키는 마을, 그러나 그렇기에 모두가 가족같은 마을의 모습이, 다른 부연 설명없이도 그냥 느껴집니다. 이 곡을 들으면서, 전 머리가 쭈뼛서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바로 이 곡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아빠/엄마/아들/딸들의 목소리들이 하나가 되어 거대한 화음을 이루는 부분은 다시 생각만해도 부르르 떨릴 정도로 멋진 부분입니다. '우리는 전통을 지키지'로 시작해서 '아빠는 전통을 지키지', '엄마는 전통을 지키지', '아들은 전통을 지키지', '딸들은 전통을 지키지'로 내용이 넘어가고 마침내는 모두가 화음을 이루며 전통을 노래하는 모습, 그리고 이국적인 선율에서 고스란히 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 느껴집니다. 이 마을에서 최근에 일어난 가장 큰 분쟁이라는 것이 '그 짐승이 말이었냐 당나귀였냐'라는 것을 봐도 알만하지 않겠어요? 옷을 입는 방식 하나하나까지, 삶의 구석구석까지 정해놓은 전통은 답답해보일지도 모르지만, 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삶 자체입니다.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을 지킨 것이다.'라는 말이 있죠. 이 노래를 들으면 자연스레 저 말이 떠오릅니다. 이 마을의 사람들이 이 전통을 무척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일까요? 전 이 '전통'을 들으면서 오히려 저 자신도 이 전통 속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평화롭게, 따스함 속에서요. 이 곡은 공연을 보고 난 후 가장 기억에 남는 곡 중 하나였으며, 제가 가장 사랑하게 된 곡이기도 합니다.
전통. 전통!
만약 우리에게 전통이 없었다면,
우리의 인생은 몹시 위태롭게 흔들렸을 겁니다.
마치, 저 지붕위의 바이올린 연주자처럼!
2. Matchmaker
: 테비에게는 다섯명의 딸이 있습니다. 자이틀, 호들, 하바, 슈프리쩨, 비엘케가 그들이예요. 무대가 전환되면, 장소는 테비에의 집으로 바뀝니다. 모두가 열심히 집안일을 하고 있어요. 큰 딸 자이틀과 호들은 어머니를 도와 일을 하고, 책 읽기 좋아하는 하바는 빨랫감 속에 몰래 책을 숨겨가지고 가다가 혼이 납니다. 슈프리쩨와 비엘케는 그저 놀러갈 생각밖에 하지 않고요.
이 중 첫째 자이틀을 보며 옌떼 할머니는 어떻게든 혼담을 찾아주려고 애를 씁니다. 테비에의 아내이자 자이틀의 어머니인 골데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혼수도 못 해가는 가난한 집안의 딸인 자이틀에게 맞는 짝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 마을에서는 소녀들과 소년들이 한 곳에서 노는 것은 물론, 서로 쳐다보는 것도 금기시 되고 있어요. 보통 결혼은 부모님들께서 정해준 상대방과 하게 되고요. 중매쟁이 옌떼 할머니가 필요한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하지만 자이틀에게는 이런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자이틀에게는 남몰래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든요. 소꿉친구이자 재단사인 모틀 말이죠. 하지만 모틀 역시 찢어지게 가난한 집이라 부모님께서 알면 허락해 주실리가 없고, 무엇보다 모틀이나 자기가 직접 허락을 구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속만 바짝바짝 태우고 있었던 거죠.(마을의 '전통'상, 혼담은 당사자가 아닌 중매쟁이를 통해 전해야 합니다) 그러던 차 나타난 옌떼 할머니는 자이틀에겐 그저 부담스러운 손님일 뿐입니다. 저번에는 어떻게 핑계를 대서 거절했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까요. 그런데다가 철없는 동생들은 '언니가 빨리 시집을 가야 우리 차례도 오지. 아아, 옌떼 헐머니가 우리에겐 도대체 어떤 멋진 신랑감을 찾아주실까?'라며 설레발을 치고요. 이 노래는 바로 이 자매들의 대화입니다. 그저 신나서 앞으로의 왕자님을 그려보는 동생들과 '우리 집 사정이라면 절대 그런 왕자님을 만날 수는 없다'고 일침을 놓는 자이틀의 노래죠.
여자 아이들이 한 점 구김살 없이 밝게 웃고 떠드는 걸 보면 종종 '저 때가 참 좋지.'라고 생각하게 될 때가 있어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좋아하는 연예인의 일상이고, 나쁘게 나온 중간고사 점수에 한숨을 푹푹쉬는 모습조차 귀여워보이는거요. 하지만 이 자매들의 대화는 그렇다가도 어딘가 씁쓸해지는 면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들의 상황이 꼭 '지난 과거풍습'만은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요? 아무래도 제가 결혼을 생각해야 할 나이이기 때문이겠지만, 친구들과 이런 대화를 한 적이 있었어요. '내 미래의 남편은 어떤 사람일까?'라면서 수다를 떤 적이 있었죠. 처음에는 이상형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막 늘어놓으며 까르륵 웃었지만, '하지만 집안 배경도 좋지 않고, 재산도 없이 정말 내 몸 하나만 가지고 가야 하는 우리같은 사람들이 선을 봐서 좋은 혼처를 얻긴 힘들지 않겠어?'라는 말이 나왔고, 아무도 그 말에 대해 반박을 하지 못했답니다. 그리고 다들 씁쓰레하게 웃었죠.(웃음) 이 딸들도 모두 남몰래 바라는 남자들이 있습니다. 자이틀은 모틀을, 호들은 랍비의 아들을 몰래 마음에 두고 있었죠. 하지만 이루기 쉬운 꿈은 아니였어요.
대체 뭘 기대했어? 나도 정말 힘들어.
허나 패물도 없는 가난뱅이 딸에게
남자면 다 땡큐!
자이틀의 불안한 예감대로, 옌떼 할머니는 자이틀에게 혼처를 가지고 옵니다. 도축쟁이 라자르가 죽은 전부인을 대신할 둘째 부인을 구하고 있었거든요. 라자르는 테비에(자이틀의 아버지)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지만, 어쨌거나 부자이고...자이틀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어요. 문제가 있다면 테비에는 라자르가 무식하다며 그를 썩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죠. 옌떼 할머니는 골데에게 일단 테비에보고 라자르를 찾아가라고 설득해 보라 하고, 골데는 꼭 그러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3. If I Were a Rich Man
: 배경은 늦가을의 숲속. 말이 다치는 바람에 직접 수레를 끌고 일해야 하는 가난뱅이 테비에는 하나님께 푸념을 합니다. "하나님, 당신은 참 가난한 사람을 많이도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저, 거기 위에서 아주 큰 문제가 생기는 게 아니라면, 제가 아주 조금만 부자가 되면 안 되겠습니까? ........아, 물론 전 당신에게 불평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요."라며요. 참 귀엽지 않나요? 테비에는 그저 평범한 아버지입니다. 정치에는 관심도 없고, 그저 먹고 사는 것에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고, 딸들이 행복하게 되길 바라고, 아내의 바가지에 벌벌 떠는 평범한 남편이고, 평범한 아버지예요. 그런 테비에의 모습이 잘 드러나는 곡이 바로 이 곡이죠. 그리고 제가 이 작품을 알게 된 계기, 거기에 이 작품을 예매하게 된 계기가 된 곡이기도 하고요. 테비에가 바라는 건 큰 게 아니예요. 그냥 커다란 집에서 살고, 일하는 게 걱정 없어지면 회당에서 율법서를 공부하고 싶고, 가끔씩 사람들이 자기에게 충고를 구하러 오면 으쓱해지겠지...라는 소박한 상상을 합니다. 그 상상에 취해 흥얼대며 안 되는 몸으로 춤을 추는 모습에는 절로 웃음이 나고 그 웃음은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지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하는 테비에의 모습은 정말 귀엽습니다. 아버지뻘되는 분의 모습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도 되는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잠깐의 상상에 취해 있다가 다시 손수레를 끌고 지는 해를 배경으로 걸어가는 테비에의 쳐진 어깨에서 전 알수없는 슬픔도 느끼게 됩니다. 테비에는 바로 제 곁에도 있으니까 말이죠.
"가끔씩 이런 생각을 합니다.
혹시 당신은 심심하실 때마다 '오늘은 테비에를 어떻게 골려줄까?
...라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
테비에는 그렇게 오늘도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다가 도시에서 온 청년인 페르칙을 만나게 되지요. 페르칙은 마을 사람들에게 급진적인 사상을 주장하기 시작하고, 그 생각들은 전통을 중시하며 살아가는 마을사람들에게 반감을 삽니다. 하지만 '이제는 여성들도 배워야 할 때입니다.'라는 페르칙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테비에는 그를 딸들의 가정교사로 삼아 집으로 데리고 오죠. 세 끼 식사를 보수로 하고요.
4. Sabbath Prayer : 다시 배경은 테비에의 집입니다. 옌떼 할머니가 다녀간 이후 마음을 졸이던 자이틀은 모틀보고 아버지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말해보라 재촉을 하지만 소심한 모틀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안식일이 시작됩니다. 이들의 안식일 기도는 참 소박해요. 정갈하게 촛불을 켜고 예복을 갖춰입고 하는 기도는 그저 평화와 행복, 그리고 자기 딸들에게 좋은 남편감을 찾아달라는 것. 우리가 매일 하는 기도와 비슷합니다.
주의 축복
건강한 삶
아침 일에도 주님의 은총이
죽의 착한 딸들에게
사랑하는 남편을 보내소서
평화와 행복 가득한 일생을 기원합니다, 아멘
이 안식일 기도는 유대인들의 분위기를 잘 전해줍니다. 이 장면 외에도 작품 전체에는 유대인들의 생활방식과 삶이 고스란히 녹아들어가 있어요. 굳이 하나하나 보여주지 않아도, '아, 이렇겠구나.'라고 깨닫게 해 준달까요. 이 작품은 정말 '뮤지컬'입니다. 노래가 있고 이야기가 있고 춤이 있고, 무대가 있고, 의상이 있고, 꼭 필요한 소도구들이 있고... 무대 도구들과 배경은 많이 생략되어 있음에도 무대가 비어 보이지 않고, 황량한 아나테프카를 느끼게 해 줍니다. 그러나 그 땅이 차갑다기보다 따뜻하게 느껴지게 하는 것은 뒤로 펼쳐진 조명과 배경 때문이겠지요. 은은하게 깔린 노을, 뉘엿뉘엿 저물어가는 하늘의 아름다운 색상은 그 자체만으로도 무대를 완성시켜요. 1막 처음에 나오는 '전통'에서도 그렇고, 2막에서의 결혼식 장면이나 일상의 소소한 동작들에서도 이들의 삶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춤! 제가 춤에 대해서는 잘 몰라서 안무가 어떻다고 말하기는 조심스럽지만, 정말 여기 안무는 저 같은 문외한도 빼어나다는 것이 느껴지는 안무였어요. 춤 동작 자체가 난이도가 높다거나 아름답다기보다는 춤이 있기에 이야기가 진행되고, 그 동작은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이게 바로 뮤지컬에 춤이 필요한 이유구나!'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안무였거든요. 이 작품에서 춤은 참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삶을 나타내기도 하고 인물들의 감정 흐름을 보여주기도 하고, 인물들의 갈등을 상징하기도 하죠. 이후에 나오는 호들과 페르칙의 관계에서도 춤은 무척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전통이 조금씩 바뀌는 것도 역시 춤을 통해서 표현됩니다.
5. To Life - Dance
: 골데이 성화에 못 이긴 테비에는 라자르와 만날 약속을 한 주점으로 찾아갑니다. 거기서 라자르의 청혼을 받고 테비에는 고민에 빠지지만, 곧 허락을 해 주고 말아요. 라자르가 부자라는 것도 있지만 테비에의 마음을 움직인 건 '그래, 이 사람이 내 딸 자이틀을 '좋아한다'잖아? 그러면 그 애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노력할 게 아니냔 말야.'라는 거였어요. 이런 테비에의 모습에 슬며시 웃게 됩니다. 테비에는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바보스러우리만치 순박한 사람. 종종 아내에게 "이 집안의 가장은 나야! 내가 대장이라구!"라고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 아내의 말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그저 사랑하는 가족들의 행복만을 바라는 사람이고, 일이 힘들다고 투덜거리며 게으름을 피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묵묵히 일을 하는 사람이죠. 그리고 유연한 마음을 가진, 열린 사람이기도 하고요.
이 작은 주점에도 갈등은 있습니다. 유대인들과 러시아인들의 갈등이죠. 유대인들에게 러시아인들은 핍박자이고, 어울리지 못할 사람들입니다. 라자르와 테비에의 혼담이 성사된 이후 축하 분위기로 떠들석해진 주점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시비를 걸어오는 러시아인들때문에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화해를 하려는 피에드카의 손을 잡고 처음 춰 보는 춤을 기꺼이 따라추는 모습에서 테비에가 어떤 사람이지 보입니다. 피에드카와 테비에 덕에 러시아인들과 유대인들은 다시 웃으면서 함께 축하할 수 있게 되었고, 그들 역시 아나테프카의 한 모습으로 함께하는 사람들이 되어갑니다. 이 장면은 보면서 굉장히 따뜻한 기분이 들었던 장면 중 하나인데, 춤을 통해 말 없이 서로의 감정이 누그러지고, 처음에는 서로에게 대항하기 위해 추던 춤이 조금씩 어우러져 동작이 변한 것이 아닌데도 조화를 이루는 것은 그저 무척이나 '아름다웠기' 때문입니다. 유태인들을 몰아내던 동작이 그들에게 다가가는 동작이 되고, 이들과 너무 달라서 어울릴 수 없을 것 같던 유태인들의 춤이 그들의 안무와 기가막히게 어우러져가는 모습, 마치 원래부터 하나가 되기 위해 만들어진 춤인 양, 그렇게 조화를 이루어가는 모습은 그 과정 하나하나가 감동적입니다. 그런 게 가능한 아나테프카라는 작은 마을이 더더욱 사랑스러워지고요. 그리고 분명 이 조화의 중심에는 '사람좋은' 테비에가 있었겠죠.
테비에는 요즘 세상에서라면 참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요즘같은 각박한 세상에서는요. 테비에에게 좋은 신랑감을 돈이 많은 사람도 아니고(물론 그도 라자르의 돈을 아예 안 보는 것은 아닙니다만), 자기 딸을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성실하고 정직하고, 이왕이면 유식한 사람이니까요. 이런 테비에이기에 러시아 군인들이 그 딸의 결혼을 축하해주고, 러시아군의 장교도 그에게만은 미리 탄압령을 알려주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네, 테비에와 라자르가 결혼에 합의해서 잔뜩 들뜬 분위기를 방해라도 하듯 나타난 러시아군의 장교는 무척 씁쓸한 얼굴로 테비에에게 이제 곧 유태인 탄압령이 있을 것이라고 귀뜸해줍니다. 다들 같은 사람들일 뿐인데 왜 핍박과 고통을 서로에게 주어야 하는 것일까요? 테비에의 시선을 피하는 장교의 눈에서, 살짝 떨군 고개에서 그 소식을 전하는 일이 그 자신에게도 힘든 일이라는 것이 짐작됩니다. 테비에의 말처럼, 그는 러시아인이지만 평생 아나테프카 근처에서 살아왔고, 테비에들이 사는 것을 봐 왔고, 그들과 삶의 일부를 공유하는, 아나테프카의 일원이었으니까요.
6. Tevye's Monologue : 한편 가정교사로 들어온 페르칙은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통해 사회주의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호들은 그것을 보며 코웃음치지만 페르칙과 다투다가 점차 그에게 끌리게 되죠.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고 소년과 소녀가 서로 쳐다보는 것도 금기시되는 마을에서 스스럼없이 자기에게 다가서는 이성에게 자연스럽게 호감을 가지게 되지요. 그러고보면 이 작품은 '춤'을 참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 웨스트사이드스토리나 캣츠처럼 춤이 전면에 나서지 않으면서도 등장인물들의 감정이나 상황을 춤을 통해 보여주는 장면이 참 많아요. 앞서 말한 To Life에서의 러시아인들-유대인들의 춤도 그렇고, 전통에서 유대인들이 서로 손을 맞붙인 춤도 그렇지만, 이 장면에서도, 그리고 앞으로도 춤은 구구절절 늘어놓아야 할 감정이나 상황을 자연스럽게 알게 해 줍니다. 처음에는 페르칙에게 이끌리듯 허둥지둥 시작되는 춤은 어색합니다. 급진적인 사상을 가진 페르칙과 전통을 몸에 입은, 그러나 아직 젊기에 그 전통을 깨 버릴 수 있는 호들의 관계처럼, 어딘가 엇나가고 삐걱거리죠. 하지만 춤이 계속될 수록 호들은 페르칙에게 발맞추게 되고, 그 춤에 빠져듭니다. 그리고 페르칙에게도, 페르칙의 사상에도 빠져들게 되지요.
그나저나 일단 그렇게 떠들석하게 술집에서 축하를 주고받았는데, 이 작은 마을에서 소문이 퍼지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이미 마을에는 자이틀의 결혼 소문이 쫙 퍼졌죠. 덕분에 자이틀과 모틀은 전전긍긍합니다. 라자르와 결혼하면 자신은 불행해질 거라고 흐느끼는 자이틀과 없는 용기를 다 끌어모아서 테비에의 허락을 구하는 모틀에게 그만 테비에는 넘어가고 맙니다. 사실 이 둘의 결혼선언은 그야말로 파격적이기까지 한 거죠. 지금에야 연애결혼이 당연시되지만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서는 연애결혼은 커녕, 결혼식에서야 상대방 얼굴을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으니까요. 테비에와 골데도 그렇게 만나게 되어고요. 때문에 처음에는 '이게 말이 돼? 장난해?'라고 분노하기도 하고
'가만있어, 이제 이 애비의 허락도 필요가 없게 된 세상인가?'라고 혼란스러워하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자식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며 허락해주고 맙니다.
'허나 저 애틋한 저 표정, 정말로 사랑하나?'라면서요. 이 과정에서 혼란스러워하는 테비에의 모습도 그렇고 싹싹비는 모틀의 모습도 얼마나 귀여운지요! 그리고 역시 '그나저나 이거 골데에게 어떻게 말해야 하나!'라면서 난감해하는 모습에는 그저 키들거리게 됩니다.
7. Miracle of Miracles : 세상에는 여러가지 사랑이 있지요. 제가 아직 세상물정을 몰라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전 자이틀과 모틀의 사랑이 좋습니다. 제가 해 보고 싶은 사랑이기도 하고요. 가진 건 부족할지라도, 성실하고 정직하고 순박한 사람과 서로 믿어가며 서로가 있음에 기쁨을 느끼는 그런 사랑이요. 자이틀은 가난한 집의 장녀입니다. 딸들 중 가장 '현실적'이기도 하고요. 다른 동생들이 결혼에 대해 단꿈을 꿀 때 일침을 놓기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죠. 그래도 자신의 사랑을 지켜갈 줄 알고, 그럴 각오를 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럽습니다. 소심해서 제대로 말도 못 꺼내지만 결국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 벌벌 떨면서도 청혼을 하는 모틀도 사랑스럽기는 마찬가지예요. 정말 둘이 딱 맞는 짝인 것 같죠. 분명히 가난할지는 몰라도 행복하게 살 거라고 고개를 끄덕거리게 되는 연인들입니다. 어휴, 어째 나이에 비해 애늙은이같은 말을 하게 되는 것 같지만, 저렇게 예쁘게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그저 제가 다 행복해집니다.
모세가 파라오마음을 돌렸던 그 기적
홍해 둘로 갈라내신 하나님
그런 게 기적이야
하지만 그 수많은 기적 중, 가장 신비로운 기적은
이렇게 하찮은 듯한 이 날에 바로 날 찾아왔네.
당신이 내게 온 것.
8. Tevye's Dream : 아버지의 허락을 받은 연인들이야 행복에 겨워 어쩔 줄을 몰라하지만 테비에에게는 현실적인 문제가 하나 더 남아있습니다. 바로 골데를 설득하는 일이죠. 부자 라자르와 딸을 결혼시킬 생각에 기뻐하는 골데에게 가진 거 하나 없는, 중고 재봉틀조차 살 돈도 없는 가난한 재봉사인 모틀과 결혼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는 것을 전했다가는 바로 날벼락이 떨어질테니까요. 아무 고민없이 깊이 잠든 골데의 얼굴을 보면서 한숨만 푹푹 쉬는 테비에의 속이 어찌되었던 보는 입장에서는 이게 또 그렇게 흥미진진합니다. 강한 척 해도 실은 공처가인 테비에와 테비에의 큰소리에 더 큰 소리로 맞대응하는 골데를 보면요. 골데를 깨울까 말까 안절부절하는 테비에의 모습은 우습기도 해서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더욱 기대하게 되죠.
결국 테비에는 악몽을 꾼 척하며 비명을 질러댑니다. 그 비명에 잠에서 깬 골데은 도대체 무슨 꿈이길래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느냐고 말하고, 테비에는 간밤에 꾼 꿈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뭐, 골데만 빼놓고 다 알지 않나요. 실제로 그 이야기는 테비에가 골데를 설득하기 위한 거짓말이라는 걸요. 자이틀의 할머니가 간밤에 꿈에 나타나 자이틀에게 딱 맞는 짝은 재단사 모틀이라고 이야기를 해 줬고-비록 꿈 속에서 자신은 그럴리가 없다고, 라자르라고 항변했다고 말하며 골데의 눈치를 살피는 것도 잊지 않고요-, 거기에 라자르의 전부인이 결혼을 강행할 경우 저주를 퍼붓겠다고 했다면서 호들갑을 떨어댑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던 골데도 점차 이야기에 빠져들더니 이후에는 '이게 바로 계시다!'라며 오히려 모틀과 꼭 결혼을 시켜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죠. 이 꿈 속의 장면은 으시시하게 꾸며놓긴 했지만 그 이시시함은 할로윈의 그것과 비슷합니다. 분명 사람들은 기묘한 가면을 쓰고 나오고 흩날리는 안개까지 나옵니다만, 기본적으로는 코믹하고 유쾌하죠. 이 장면은 비록 배경이 어두운 밤, 꿈속이긴 하지만, 이 작품 내에서 가장 밝고 즐겁게 볼 수 있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기쁘게 웃을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기도 하고요.
(2막으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