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붕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
- 일시 : 2008.12.5, 8PM
- 장소 :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 캐스트 : 노주현(테비에), 이미라(골데), 방진의(자이틀), 김재범(모틀), 해이(호들), 이경수(페르칙), 김정미(하바), 정현철(피에드카), 박란주(슈프리쩨), 이슬(비엘케), 함건수(라자르 울프), 이흥구(랍비), 김광혜(옌떼), 박선주(샨들), 나정숙(자이틀 할머니), 오은미(프루마 사라), 정연주(마마스), 이상준/민경현/박성호(파파스), 진상현(멘들), 김경열/김명일/이창선/박우식(유태인들), 배준성/정재헌/유기호/신상민(러시아인들), 김준태(나훔), 김보경/배지혜/이지현(딸들), 정광영(관리), 정덕근(피들러), 정덕근(클라리넷 솔로), 조찬희(어린 피들러)
- 지휘자 : 이영애/악장 : 이소진
(1막에서 이어집니다.)
<Act 2>
1. Wedding Procession : 마을은 자이틀과 모틀의 결혼 소문으로 시끌벅적합니다.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한 집안의 경사가 마을 모두의 경사가 되곤 하죠. 모틀의 친구들은 모틀네 가게에서 축하를 해 주고 있고, 잠깐 모틀이 결혼식 예복을 마련하러 간 사이 모틀의 가게를 맡아주게 된 하바는 러시아인들에게 희롱당할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을 러시아 군인인 피에드카가 구해주게 되면서, 이들 사이에 조금씩 특별한 감정이 생기게 됩니다.
자녀들이란 참 이상하죠. 아니, 생명체란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녀에게 가장 행복하고 안전한 곳은 부모의 품 속일텐데 자녀들은 그 품 속을 언젠가는 박차고 나와버리고 말아요. 그리고 누군가에게 끌리는 감정이란, 우리의 손을 벗어난 것이니까요. 책을 좋아하고, 그래서 자녀들 중 가장 똑똑했던 하바는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을거예요. 피에드카와의 관계가 쉽지 않을거라는 것은요. 나치 시절의 유대인과 독일인의 사랑에 맞먹는 일인걸요. 어떤 이유로든 자녀는 부모의 품을 박차고 세상에 나옵니다. 그리고 지치고, 상처받고.... 저도 이제서야 조금 알 것 같습니다. 그럴 수 있는 건, 부모님들은 언제나 날 기다려주리라는 확신이 내심 있기 때문이라는 걸요.
2. Sunrise, Sunset : 이윽고 자이틀과 모틀의 결혼식날이 됩니다. 이 노래는 이 뮤지컬에서 가장 유명한 곡 중 하나라고 해요. 보면서 '과연....'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노래는 결혼식 노래같지 않게 구슬픕니다. 느릿한 곡조에 맞춰 천천히 움직이는 일행의 모습은 결혼식 일행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장례식같아 보이기까지 합니다. 결혼 당사자들이야 좋아서 어쩔줄을 모르지만, 지켜보는 마음은 꼭 그렇지만은 못할테니까요. 허락은 해 줬지만, 가난한 재단사에게 시집보내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앞으로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결혼을 시키는 마음은 편치많은 않겠지요. 그리고 어찌되었건, 품 안의 자식을 떠나보내야 하는 일인걸요. 결혼하는 모습을 보면서 지난 날의 일들이 떠오르고, 기쁘기도 하는데 계속 눈물이 날 것 같은 부모님의 마음이 가득 느껴지는 장면입니다.
내 아가 언제 저리 컸나
철없이 놀던 저 아이
난 늙은 기억도 없는데
참 빨라.
내 딸이 벌써 신부라니
내 사위 듬직도 하네.
처음 걷던 그 때 어제 같은데.
뭐라고 말해줘야 하나
쉽지만 않은 인생길. 전 부모님과의 사이가 좋지만은 않았습니다. 어느 가정이나, 문제없는 가정은 없다고 하지만, 평범한 부모자식관계는 아니었죠. 전 너무 일찍 독립을 했고(이미 중학생 때부터 학비는 제가 부담하기 시작했으니까요.), 부모님께 큰 잔소리 하나 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기쁜 일과 힘든 일을 함께 하며 그 사이에 유대관계가 맺어지는 거라면, 전 어쩌면 가족에게는 조금 이질적인 존재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그들이 제 영역에 들어오는 것 역시 싫어했거든요. 갈등이 있으면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회피했고, 관계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일들을 귀찮게만 여겼습니다. 철없던 시절에는 정말 가족과 완전히 분리되어 혼자서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이런 저도 요즘에서야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를 느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스한 존재이고, 무조건적으로 나를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 그들임을 느낍니다. 너무 늦은건지도 모르지만, 그게 가족이 아닌가요. 그게 부모님 아닌가요. 그게 가족인가봅니다. 언제라도 너무 늦은 건 없는, 이 세상에서 나와 가장 가까운 존재들이요. 사회적으로 봤을 때, 아무 능력도 힘도 없는 부모님일지라도, 그들은 내게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이제서야 느낍니다. 그래서였을거예요. 이 장면에서 계속해서 눈시울이 시큰해지는 것을. 어떤 것도 그들을 제게서 떼 놓을 수 없음을 느낍니다. 돌아오기까지 참 오래 걸렸습니다만, 이제서야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정말로 사랑한다고요. 얼마나 소중한 분인지, 이제서야 깨달았다고요. 사랑합니다.
3. Wedding Dance
: 모틀과 자이틀의 결혼식 축하 축제는 2막에서 가장 풍성한 '볼거리'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춤과 '병 춤'은 보면서 아슬아슬한 스릴을 제공해주고, 오케스트라 외에도 옆에서 신나게 들려오는 클라리넷은 결혼식 분위기를 더욱 띄워줘요. 그리고 유대의 결혼 풍습을 볼 수 있는 기회도 되고요. 네 기둥으로 받친 천 아래 서 있는 신랑과 신부의 모습, 병을 밟아 깨는 것으로 시작되는 축제, 또 이 마을 전통을 잘 보여주는, 무대를 가로지르는 '끈'까지요. 이 '끈'은 그 자체가 이 마을의 전통을 상징하는 듯 보입니다. 끈 한쪽에는 남자들이, 끈 반대편에는 여자들이 있어서 서로 섞이지 못하게 되어 있지요. 그렇게 둘로 나뉘어 있는 끈을 넘어 페르칙은 '누구 나와 함께 춤을 추지 않을래요?'라고 손을 내밀고, 소동이 벌어집니다. 마을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그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그리고 그 손을 잡는 호들의 모습에 마을 어른들은 혀를 차며 분노합니다. 그러나 한 명 두 명 그 춤에 참가하게 되며 오늘, 마을 전통 하나가 깨집니다. 좀 전과는 또 다른 활기가 마을을 가득 채우고, 처음에는 혀를 차던 어른들마저 이 춤에 함께하게 되고 결혼식 분위기는 최고조에 다다릅니다.
그 행복의 절정에서, 러시아인들이 들이닥칩니다. 망연자실한 테비에를 보면서도 러시아인들은 유대인들을 구타하고, 집기를 부숩수지요. 말은 해요. '정말 미안하네, 테비에, 정말 미안하네.'라고요. 하지만 당하는 사람 마음이 어디 그렇던가요? 흥겨워야할 결혼식 음악을 배경으로 유대인들을 짓밟고 난동을 부리는 러시아인들의 모습에는 그만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상명하복의 군인이라 어쩔 수 없겠다고 생각은 해 보지만 그래도 가슴이 답답한 것은, 저 역시 당하는 처지에 놓이기 쉬운 사회적 약자이고, 또 지금까지 테비에와 그 마을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의 삶에 애정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일겁니다. 허탈해하며 널부러지고 깨진 휑한 결혼식장 한켠에 앉아 있는 테비에가 참 초라해보이고 작아보입니다. 이 어지러운 광장에서 방금 전까지 이곳에서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같습니다. 땅바닥에서 뒹굴고 있는 결혼 선물물에서 간신히 짐작할 정도죠.
글을 쓰다보면 종종 글이란 얼마나 많은 한계를 가진 것인가, 언어란 얼마나 단편적인가를 절실히 깨닫곤합니다. 언어로 잘못 표현했다가는 그 마음, 그 순간의 수많은 감정들이 조각나고 왜곡될까 두려워 차마 말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습니다. 이 작품이 특히 제게 그러합니다. 너무 아름다운 장면들도 많고, 제게 많은 것을 느끼게 해 주는 장면들을 그대로 묘사해봐야 그 감정의 100분의 1도 전달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말을 하지 않자니 제 안에 갇힌 감정들이 이야기를 해 달라고 아우성치는군요. 단 한 순간의 장면이 사진처럼 뇌리에 박혀서 그 자체만으로도 수십가지 말을 해 주는데, 그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지럽게 널려있는 부서진 가구들, 그 사이에 널부러진 결혼 선물들, 흐느끼며 주섬주섬 정리하는 어머니와 그 한켠에 힘없이 앉아 있는 테비에의 모습이 보입니다. 그리고 한 쪽에서 주춤주춤 거지 나훔이 다가옵니다. 거지이긴 하지만 이 마을의 가족인 나훔도 이번 결혼식에서 환영받는 손님이었죠. 나훔은 땅바닥에서 무언가를 천천히 집어듭니다. 평범한 촛대 두 개입니다. 그 촛대는 골데가 자이틀과 모틀의 결혼선물로 준비한 것. 그대로 들고가도 아무도 모르겠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못했겠지만, 나훔은 촛대를 들고 먼지를 털고 소중하게 품에 안은 채 테비에에게 건넵니다. 하지만 테비에는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손을 내밀지도 못해요. 무표정한 테비에의 모습과 어딘가 슬픈 미소를 띈 나훔이 내미는 손, 가진 것 없는 거지가 촛대를 내미는 그 모습은 꼭 한 폭의 그림 같습니다. 거리에서 만난 한 무명화가의 그림에 마음이 움직이는 것처럼, 차가운 겨울에 멀리서 들려오는 거리의 악사의 바이올린 선율처럼, 그 장면은 그대로 가슴에 새겨집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 어떤 평이나 어떤 설명을 할 필요도, 할 수도 없네요. 그저 '아아, 바로 이게 그들이구나. 바로 이게 아나테프카의 삶이구나.'라는 생각만이 들었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도저히 이 장면을 제대로 그려낼 수도, 그리고 이 때 느껴진 감정을 말로 표현할 수도 없네요.
4. Now I Have Everything : 모틀과 자이틀의 결혼식으로부터 두 달이 흐르고, 그걸 바라보는 테비에의 마음은 편치않습니다. 그들은 비록 행복해하지만, 너무 가난해서 그 생활이 비참할 정도였거든요. 그저 일하기 좀더 수월할 수 있게 중고 재봉틀 하나라도 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현실은 쉽지 않습니다.
한편 결혼식 이후 페르칙과 호들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옵니다. 페르칙이 다시 도시로 떠나야하는 일이 생겼어요. 슬쩍 들어보자니 뭔가 사회주의 운동, 혁명과 관계되어 있는 일 같습니다. 그게 무엇이든, 호들의 눈에는 달갑게 보이지 않는 게 당연하죠. 자기에게는 정말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고 말하긴 하지만 페르칙 역시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습니다. 계속해서 급진사상을 주장하며 마을 사람들에게 소소한 소란을 일으키고 다니는 페르칙이 곱게만 보이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사랑하는 연인에게 고백하기 위해서 쩔쩔매는 모습을 보면 '얘도 젊은 애기이긴 하구나.' 싶어서 은근슬쩍 미소짓게 되지요. 그도 역시 사랑 앞에서는 약해지는 사람, 호들의 허락에 기뻐서 어쩔 줄 모르는 페르칙의 모습은 그저 사람일 뿐입니다. 그저 사랑에 빠진 사람.
5. Tevye's Monologue (reprise) : 테비에에게 또 다시 골치아픈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호들과 페르칙이 결혼하겠다고 '통보'한 거예요. 허락은 필요 없지만 축복은 받고 싶다나요? 테비에는 그저 기가막힙니다. 아니, 자이틀과 모틀은 적어도 허락을 구하기라도 했지, 이젠 아예 허락을 하든말든 결혼을 하겠다고 하다니요. 뭐, 하지만 테비에는 또다시 '저렇게 간절한 눈빛, 사랑하나?'라면서 허락을 해 주고 축복까지 해 주고 말지요. 테비에의 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조금씩 변하는 사회를 말해주는 것 같습니다. 작은 전통이 하나 깨지고, 사회의 변화에 휩쓸리고, 결국 세상이 돌아가는 일이 테비에의 가족을 하나하나 흩어놓는 걸 보는 기분이라 보는 것이 편하지 않아요. 테비에의 딸들은 험한 길을 선택해 한 명씩 떠나버립니다. 자이틀이 그랬고, 호들은 그보다 더한 길을 걸으려 하고, 곧 하바 역시 그렇게 됩니다. 테비에는 이들의 마음만을 보고 허락하지만, 현대에 살고 있고, 조금이나마 과거를 알고 있고, 페르칙이 앞으로 어떤 길을 걷게 될지 짐작할 수 있는 저는 기뻐하는 젊은 연인과 그들을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짓는 테비에의 모습에 마냥 기뻐하고 설레할수만은 없었습니다. 앞으로 호들이 걸어야 할 길이 가시밭길임을 알고, 그걸 바라보는 테비에의 마음이 어떨지, 닥치지 않아도 이미 짐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6. Do You Love Me? : 앞으로 이 연인들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지금 테비에에게 당장 닥친 문제는 '골데에게 이 사실을 어떻게 전해야 할까'라는 것입니다. 페르칙과의 결혼을 허락했다는 걸 알면 골데가 펄쩍 뛰고 난리가 날 테니까요. 거의 테비에에게 얹혀사는 페르칙은 사실 거지나 다름이 없는 처지거든요. 제가 골데라도 반대했을 겁니다. 일단 웅얼웅얼 '페르칙과 호들의 결혼을 허락했어.'라고 말을 던지고 도망가려는 테비에를 붙잡아 다다다다 쏘아대려는 골데에게 뜬금없이 테이베가 묻습니다. '당신, 날 사랑해?'
지금에서야 상상하기 힘든 경우이긴 하지만, 과거 우리나라도 '결혼 당일에서야 상배방의 얼굴을 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테비에와 골데도 그렇게 만나 부부가 된 사이죠. 처음부터 사랑해서 걸혼한 사이가 아닌, 양가 부모님의 합의에 의한 결혼이었고, 그렇게 25년을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제서야 서로 그 말을 하죠. '당신 날 사랑해?'라는 단순한 질문을요. 서로 결혼식에서야 만나 걱정도 되고 떨렸지만, 그렇게 부대끼며 살아가며 든 정은 뜨겁진 않을지라도 견고합니다. 그것 역시 사랑의 또다른 모습일테고요. 이상하게 조금씩 시간이 갈 수록 젊은 연인들의 뜨겁고 열정적인 사랑보다는 노부부의 맞잡은 손에 더 큰 감동을 받습니다. 언젠가 공연장에서 제 옆자리에 앉는 노부부가 서로 꼭 손을 잡고 조용히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에 따스함을 느낀 적도 있었고요. 테비에와 골데가 매일 투닥거리고 서로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려도 저 은근한 다정함, 그리고 익숙함, 함께 한 세월만큼 쌓여가는 안정감이 부러워집니다. 언젠가 저도 저럴 수 있을까 싶기도 해요. 테비에와 골데가 무대의 양 끝에 서서 부르는 모습은 딸들의 연애만큼이나 아름답고, 그들의 사랑보다도 더 깊은 감정을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처음에는 테비에에게 틱틱거리며 대답을 하지 않던 골데도 조금씩 흔들리며 '그게 사랑 아냐?'라고 말하는 모습에서는 왠지 코끝이 찡해서 괜히 손가락만 만지작거렸습니다.
날 사랑해?
- 미쳤나?
사랑하냐고?
- 아니, 글쎄, 25년째 당신 빨래하고
밥하고, 청소도
애들도 낳고 이렇게 늙어 뭔 사랑타령이야?
골데, 날 사랑해?
- 뭘 바래?
날 봐, 사랑하냐고?
- 사랑하나?
25년째 같이 지내고, 싸우고, 굶었어.
평생 한 침대를 나눴어. 그게 사랑 아냐?
사랑하네!
- 그런가봐요.
그래, 나도 사랑하나봐.
변할 것 없지만 이제라도 알게 돼서 정말 다행이야.
7. Rumor-Far from the Home I Love
: 페르칙이 떠나고 시간이 흘러갑니다. 하지만 짐작할 수 있듯, 아나테프카에 남아있는 호들에게 들려온 소식은 기쁜 것이 아니었습니다. 페르칙이 경찰들에게 잡혀 시베리아로 유배를 갔다는 소식이었죠. 그 소식은 불길하게 마을에 퍼지고, 호들은 기어이 페르칙을 따라 시베리아에 가기로 결심합니다. 기차역에 앉아있는 호들과 테비에의 모습에 뭔가 울컥해서 알 수 없이 눈물이 고였습니다. Far from the Home I Love는 호들이 테비에에게 '아빠는 이해 못 할지도 모르지만, 난 그이를 위해 떠나야 해요.'라는 내용입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그이의 꿈이 내 꿈이 되었으니, 난 떠나요. 내 마음은 이미 떠나갔어요. 이제는 그가 나의 고향.'이라고 노래하는데, 그 눈은 다른 걸 말하고 있었어요. 눈은 '아빠, 난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아빠, 난 여길 사랑해요. 알죠?'라고 말하는 걸요. 그저 안부 전해달라며 호들의 눈을 슬며시 피하곤, 조용히 목도리를 벗어주며 토닥이는 테비에 역시 '어떻게 널 보내니, 그 추운 땅으로 어떻게 널 보내니....건강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었어요. 꼭 안아주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고 그저 어깨만 토닥이다가 떠나던 호들이 달려와 안기자 놓치지 않겠다는 듯 꼭 안아주다가도 '기차 시간 늦겠다. 빨리 가.'라고 등을 떠미는 손에서, '저게 아버지일까...'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랑한다는 말 한 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지만 묵묵히 사랑하는 마음이 안타까운, 어리석게만 보이는 아버지. 그냥 알 것 같았어요. 사실은 죽어도 품에서 보내고 싶지 않다는 걸요. 고생할 게 뻔한 그 시베리아로 어리게만 보이는 딸을 보내는 마음은 오죽했을까요. 호들이 달려와 다시 안길 때, '그냥 여기 있어라. 평생 함께 있자.'라는 말이 목에 탁 걸렸을 거라는 걸, 그냥 알겠더라고요.
호들이 가고서야 빨개진 눈으로 '제발 부탁합니다! 꼭 좀, 따뜻하게 입고 다니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 그게 테비에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게 아버지의 마음이었을 겁니다.
한때는 그냥 행복했어요.
이곳에 있는 게.
따스한 사람들이 넘치는 내 고향이니까.
"그래, 뭐 거기도 잡혀 간 랍비님이 한 분은 계시겠지....
니 왕자님에게 가서 내 안부 꼭 전해 줘.
나도 내 사위 처음부터 예뻐했다고.
내 딸, 잘 부탁한다고 내가 그러더라고, 그렇게 전해다오
........제발 부탁합니다! 꼭 좀, 따뜻하게 입고 다니게 해 주세요!"
8. Chava: 호들이 그렇게 떠나고 테비에의 집은 한결 쓸쓸해집니다. 여기에 하바까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해요. 상대는 바로 러시아 군인 피에드카입니다. 하지만 이건 정말 테비에가 허락할 수 있는 선을 넘은 일입니다. 사랑하는 당사자들이야 서로가 그저 똑같은 한 인간일 뿐이지만, 주변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렇지 못하죠. 아무리 인간 대 인간이라고는 해도 핍박하는 사람과 핍박 당하는 사람으로 맺어진 관계인걸요. 아무리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지만, 다른 민족과의 결혼은 테비에게도 용납하기 힘든 사람입니다. 기독교는 근본을 유대교와 함께하고 있어서일까요. 저 역시 테비에가 겪어야 할 갈등을 조금이나마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 테비에가 "나도 한계라는 게 있다. 어떻게 믿음이 다른 사람을!"이라고 고함치는데서 "!"하고 느끼는 것이 있었죠. 테비에는 마음이 넓은 사람입니다. 전통을 중시하기는 하지만, 가족에게는 한없이 약한 아버지입니다. 겉으로는 강한척 하지만, 속으로는 넘어가 버리고 마는 사람이예요.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포기했다가는 그가 살아온 세월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하게 되는, 놓칠 수 없는 부분이요. 그렇다고 하바를 포기하자니 하바는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어여쁜 딸입니다. 딸에 대한 사랑과 전통, 아니 전통을 넘어선 그 근본적인 부분 속에서 테비에는 갈등합니다. 딸을 포기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지금까지 살아온 환경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하바가 집을 나갔다고 망연자실해 하며 통곡할 수 있는 골데는 차라리 나은지도 모르겠습니다. 골데 앞에서는 "하바는 죽은 거야!"라고 모질게 말하지만 혼자 남아서야 '하바야, 나의 작은 새, 나의 하바야, 우리 집안의 귀여운 공주님...'이라며 하바를 떠올리며 하바를 추억하는 테비에의 모습에 '저게 아버지구나...'라고, 이해하게 됩니다. 겉으로만 무심한 척, 겉으로만 무정한 척, 겉으로만 강한 척... 말이 안 통한다고 딸들은 어느 순간 아버지를 피하고, 아버지의 그런 행동들을 '왜 저러는 지 몰라..'라며 은근 무시하곤 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는 게 아버지라는 존재였나봅니다.
내 딸을 어떻게 부정하나.
아니야, 내 믿음을 부정하고, 내 민족을 모두 부정하라고?
그렇게 많이 부정했다가는 내 등이 부러지고 말 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뮤지컬의 힘은 대단하지요. 음악이 있고 이야기가 있고, 춤이 있어요. 뮤지컬에서 잘 만들어진 reprise의 힘은 정말 큽니다. 하바의 말을 떠올리며 테비에가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 '전통 Tradition'을 부르며 마을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하바와 테비에는 서로를 애타게 부르지만 결국 손을 잡지 못하고 헤어져버립니다. 오싹했어요. 그렇게 테비에는 하바와 헤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왠지 알 것 같았어요. 테비에는 하바를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요. 자식을 잊어버리는 부모는 없을 거라는 걸, 아니, 남보다도 못한 부모자식사이가 있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테비에와 하바는 종종 서로를 생각하며 그리워할 것이라는 걸...
9. Anatevka/10. The Leave-Finale : 그렇게 하바가 떠나고 마을은 그렇게 일상이 이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세월도, 세상도 피해갈 것 같았던, 그들만으로 세상이 이뤄진 듯하던 마을인 아나테프카도 세상 돌아가는 일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었어요. 러시아 전역에 유태인 추방령이 떨어지고, 아나테프카에도 그 명령이 내려집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고 울부짖어보지만, 그건 뭐랄까...폭풍같은 거죠. 폭풍이고 화산이고, 파도같은 거예요. 폭풍보고 나를 피해가라고 말할 수 없고 화산 앞에서 터지지 말아달라고 간청해봐야 소용없는 것... 그렇게 언제까지 영원할 것 같은 마을은 너무나 쉽게 사라집니다. 모두가 가족같았던 마을인데 각자 살 길을 찾아서 하나 둘 흩어져가요. 어떤 이별 장면에서 마음이 평안하겠냐마는, 이 장면에서는 그저 한숨밖에 나오지 않더군요. 신파도 아니고, 오히려 담담하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그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확 와 닿습니다. 이제 아나테프카의 태양이 저물어갑니다. 그리고 앞으로 저 태양은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아나테프카'의 태양은, 영원히 떠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그렇게 느꼈습니다.
뭐, 아나테프카가 에덴 동산도 아니었잖아?
별 거 없잖아, 다 쓰레기더미
메시아는...일단 다른 곳에 가서 기다립시다.
우리 조상들도 허구헌날 추방당하셨지.
그래서 우린 늘 이렇게 모자를 쓰고 다니나봐.
모두가 떠나갑니다. 하나 둘. 말 없이 떠나갑니다. 그렇게 태양이 지고, 마을은 사라지는데, 지붕위에서 말 없이 바이올린을 켜던 사람이 묵묵히 작은 아이에게 바이올린을 넘겨줍니다. 조금은 서투르지만 힘차게, 다시 바이올린 선율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갈 곳 없이 남은 마지막 사람, 비참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나훔은 그 선율에 환히 웃으며 품 속에 고이 간직한 꽃을 건넵니다. 그리고 암전.
........................................아나테프카는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더 이상 어떤 말도, 어떤 단어도 더 붙일 수가 없는, 그런 장면이었습니다.
~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