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킬 앤 하이드(Jekyll & Hyde)- 일시 : 2009.1.8, 8PM
- 장소 : LG 아트센터
- 캐스팅 : 김우형(지킬), 김선영(루시), 임혜영(엠마), 김봉환(덴버스경), 류창우(어터슨), 이영기(주교), 강상범(새비지/풀), 박인배(스파이더/스트라이드), 양정열(글로솝 장군), 김호(프룹스), 유채정(비스콘필드/기네비어), 남자 앙상블(이승원-신문팔이-,황세준,문상현,조강현,최세용,최현덕), 여자 앙상블(이호정,최고운,최혜림,선영,김여진,고효진)
- 연출 : David Swan
- 음악감독 : 원미솔> 지킬, 인간 지킬.
: 나에게 있어서 지킬은 어떤 사람인 걸까. 어떤 공연을 보든간에 '나의' 인물을 만난다는 건 무척 중요한 일이다. 나의 헤드윅, 나의 엘가로, 나의 팬텀, 그리고 나의 지저스처럼. 지킬은 이번 무대로 접하기 전부터 워낙 CD를 통해 많이 들어왔지만 내 안의 지킬은 모습은 완성되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킬이 막연히 어떤 캐릭터인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어떤 지킬과 또 어떤 하이드를 좋아하는지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지킬을 보고서야 난 비로소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지킬과 하이드를 만났음을 깨달았다.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지킬이 가장 좋았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말할 것이다. 시원한 노래를 듣고 싶다면, 젊음을 느끼고 싶다면 홍광호씨로 가라. 화려한 연기와 안정적인 공연을 보고 싶다면 류정한씨로 가라. 그런데 이상하지. 내 마음을 움직인 지킬은 우형씨였다고.
이 지킬은 왜 내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은 걸까. 알 수 없다. 노래가 뛰어난 것도 아니고 연기가 화려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 감정은 깊고, 묵직하다. 난 그 속에서 불안한 한 인간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머리로 알고 마음으로 느끼고, 무엇보다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모든 게 갑자기 설명되는 기분이 들었다. 왜 지킬은 선택을 해야했는지. 왜 하이드가 나타나야했는지. 왜 루시였는지. 왜....
이 지킬은 어른이었다. 소심하고, 어떤 면에서는 평범한 어른이었다.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는 표현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살포시 짓는 웃음, 단정한 눈짓, 절제된 몸놀림으로 그는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숨긴다. 언제나 그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자기가 무너지는 그 순간조차 타인을 배려한다. 그리고 자신의 불안을 터뜨리기보다는 조용히 속으로 갈무리하고, 침착함을 잃지 않는다. 속으로는 불안하면서, 속으로는 갈등하면서도 말이다.'자네 정말 그 약으로 신의 뜻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라는 말에 '제가 할 겁니다.'라고 말할 때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쩌면 그건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래, 난 해야만 한다. 난 할 수 있다.'라고. 그 엷은 미소는 확신의 미소라기보다는 자조적인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는 언제나 불안해보였다. 엠마는 그의 버팀목이 되어주지는 못한다. 너무 어린 엠마. 엠마는 지킬을 안아주기에는 아직 어린 그녀를, 지킬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중하고, 사랑한다.
이 엠마는 지킬의 짐을 지고 갈 동반자가 되기에는 아직 어리다. 자기는 이미 다 컸고, 지킬의 길을 기꺼이 함께 걸어갈 수 있다고, 지금도 같이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가 그 동안 얼마나 알게모르게 그녀를 보호하고 아껴줬는지는 알지 못한다. 그녀가 스스로 컸다고 생각한 건 지킬이 그녀를 어른으로 대해줬기 때문일 것이다. 지킬이 여유가 없어지고 난 이후 엠마는 무척 약해보였다. 그게 어쩌면 이 엠마의 매력일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맑고 순수하고, 그래서 곧다. 그녀는 마냥 행복하게 지킬을 바라보며 웃고, 지킬은 그런 그녀를 귀여워하며 다독인다. 자신과 함께 걸어와주길 바라고 있기 때문에 엠마가 강해지길 바란다. 그녀 '앞에서' 자신의 불안함을 내비치기보다는 그가 불안한 모습을 보일 때 그의 시선은 엠마를 떠나 자신의 안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런 힘든 삶을 알겨주기엔 당신이 너무 걱정이 돼요.'라 말하는 지킬의 모습에서는 엠마를 향한 걱정을 읽을 수 있지만, 동시에 '그래도 난 따라가겠다.'라고 그녀가 선택을 내리길 기다리는 마음이 보인다. 그녀가 '물론 당신을 따라가겠어요'라고 말해도 완전히 그녀에게 기댈 수 없겠지만, 그는 그녀에게서 그래도 작은 위안을 얻는다. 그는 엠마에게 솔직하지 못하다. 누구나 마음 속에는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못하는 말들이 있고, 숨기고 있는 비밀이 하나씩 있다. 지킬의 짐은 너무 무겁고, 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너무 짙어서, 지킬은 그 그림자에서 스스로를 구원하지 못하고, 엠마의 빛은 그 그림자를 지우기엔 부족하다. 동시에 지킬이 흔들리지 않게 붙들어주기에도 그녀는 너무 약하기 때문에 지킬은 스스로를 구원할수 없음에도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노력해야했다. 그게 이 지킬의 비극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지킬에게 그 그림자의 이름은 아버지였다. 고매한 정신을 가졌었지만 지금은 눈을 피해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있는 아버지의 지킬의 삶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당시 정신병은 낙인이었다. 정신병이 유전된다고 생각했고(사실 이 믿음은 지금도 남아있다), 정신병을 가진 사람들은 치료를 받아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사회에서 격리시켜야 할 존재로 취급되었다.(이것 역시 요즘도 남아있는 생각이 아닌가) 주욱 집사로 지킬과 그 아버지를 섬겨왔던 풀조차 속이고 아버지를 숨겨야 했던 지킬에 대해 생각해본다. 어떤 수를 써 봐도 아버지는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점점 나빠지기만 한다. 그렇다고 그는 포기할 수도 없다. 그는 아버지의 병이 언제 자신에게 나타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항상 가지고 있지 않았을까. 이걸 생각할 때 '나 자신을 구하겠다'라고 하는 말, '내가 그토록 없애도 싶어했던 나 자신'이라는 말이 무겁게 다가온다. 그는 항상 불안해보였다. 애써 웃음으로 포장하지만 그는 어딘가 모를 어둠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나는 이 지킬에서 그 빈 부분을 느낀다. 그는 항상 단정하고, 소심하고, 공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이다. 또한 어딘가가 부족해보인다. 때문에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는 속으로 억누른다. 그는 약혼식에서 엠마를 만났을 때, 반가운 마음을 와락 표현하지 않고 슬쩍 미소를 짓고 덴버스경 어깨 너머로 눈웃음을 보낸다. 그리고 덴버스 경에게-약혼녀의 아버지에게- 깍듯하게 인사한다. 이사회를 설득할 때도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침착하게 설득한다. 최대한의 극적인 효과를 주기 위해 호흡을 가다듬고, 동시에 마음을 다잡기 위해 차분히 이야기한다. 그 지킬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 지킬은 이사회에 오기 전에 몇 번이나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그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예상해보고 그럴 때 어떻게 말할 건지도 생각해왔을 것 같다고. 이사회가 무섭게 반발하기 시작해도 이 지킬은 쉽사리 흥분하지 않는다. 그가 흥분하기 시작하는 건 스트라이드가 계속해서 치고 들어왔을 때부터이다. 그는 물러설 곳이 없다. 만약 그가 물러선다면 시간은 그의 정신을 갉아먹고 그는 서서히 자신을 잃어갈 것이다. 계속해서 나오는 '미쳤다'라는 말이나 '정신병자'라는 말에 그래서 그는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물론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사용한 말이 아니라 경멸의 의미를 담아서 한 말일테지만. 그래서 지킬은 자신을 다잡는 데 익숙하다. 이사회 이후 그렇게 분노, 아니 분노던가? 울분, 그래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한숨을 쉬는 그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자신을 다잡고 오히려 말 잃은 어터슨을 위로한다.
어터슨, 그는 지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지킬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친구이다. 그 앞에서만 지킬은 자기 자신을 풀어놓는다. 이사회 이후 어터슨에게 울분을 토해내는 지킬의 모습은 꼭 어터슨에게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걸 묵묵히 받아주고, 지킬이 나쁜 소리를 들으면 본인보다 더 화를 내는 어터슨은 혹시 지킬의 그림자를 알고 있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가 왜 절박할 수 밖에 없는지, 그런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지 이해하는 건 아닐까. 그래서 그는 끝까지 지킬의 곁에 남아있어 주려고 했던 건 아닐까. 그는 항상 지킬에게 '믿음'을 이야기한다. '난 자네를 믿어왔네. 내 진심을 받아주게.' '평생 자네를 믿어왔네. 그리고 지금도.'라고. 그의 믿음은 그의 의지였고, 지킬의 곁에서 어느 순간에나 그의 편이 되어 준 사람이었다. 지킬을 변함없는 믿음으로 지탱해 준 것은 엠마보다도 어터슨이었다. 만약에, 만약에 어터슨이 지킬의 비밀을 알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는 얼마나 많은 의심을 떨쳐버려야 했을까. 지킬이 미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있었을까. 언젠가 그런 순간이 온다면 그는 자신이 손으로 그를 끝낼 결심을 해 본 적은 없었을까. 지킬이 변해가는 모습을 보면서 누구보다 불안하지는 않았을까? '드디어 때가 온 걸까?'라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만약, 그의 그림자를 몰랐어도 그는 여전히 불안에 맞서 믿음을 지켜야했다. 이유없이 친구가 망가져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비이성적인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얼마나 말리고 싶었을까? 그 지킬을 처음 만난 내 눈에도 그가 불안함을 가지고 있다는 게 보이는데 말이다.
Now there is no choice - This is the moment를 부르는 지킬의 모습에서도 난 두려움과 불안함을 느낀다. 사실 이 노래에서 그런 것을 느낀다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눈에 띄는 불안함이 아니라, 음, 불안함이라는 단어보다도 '불확실함'이라 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는 확신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확신하지 못하는 느낌이든다. 무의식중에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을 느끼지만. 하지만 그는 '확신해야만'한다. 그런 괴리감이 슬며시 느껴진다. 그는 천재로 보이지도 않고, 노련하게 보이지도 않는다. 어쩌다보니 그 앞에 서 있다. 자신의 선택에 완전한 확신을 가지지도 못하면서도 그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 선택이 그를 파멸시킬 것을 알았더래도 그는 그 사과를 깨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가 선택할 수 밖에 없는 유일한 답안이니까. 그에게 있어서 그 답이 최선이니까.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그 불안함 때문에 난 이 지킬에게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이상하기도 하지.
그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다. 그리고 실은 그렇게 선하지도 않다. 다만 굉장히 다정한 사람이더라. 또 평범한 사람이기도 하고. 엠마를 사랑하고-이건 그의 의지이다-, 그녀의 울타리가 되어주지만, 동시에 루시에게 흔들리기도 한다.-이건 그의 마음이다- 레드렛에서 루시를 만나고 난 이후, 루시는 그를 흔들어 놓았고, 그는 루시에게 분명 끌리고 있었다. 김선영씨의 루시는 여전히 내 외로움을 가만히 건드린다. '괜찮아, 난 괜찮아.'라고 거울을 바라보며 중얼거릴 때, 실은 괜찮지 않다고 속에서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온다. 그 순간의 느낌을 난 이 분의 무대에서 느낀다. 그녀는 삶에 많이 지쳐있었다. 지쳐서 '삶'에 조금은 무관심해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그녀는 자기의 삶은 좋아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살고 있기는 한데, '루시'로 살아가는 자신을 싫어해서 끊임없이 회의를 느낀다. 이 루시는 가만히 몸을 웅크린 채 시간이 흘러가길 기다리고 있는 듯 보인다. 시간은 의미가 없고 순간 순간은 견뎌내야 할 무엇인가에 불과하다. 이 루시에게서 No One Knows Who I Am은 가장 중요한 넘버이고, 또 이 넘버를 빼고는 그녀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녀는 가만히 꿈을 꾼다. 누군가가 나타나서 자기의 모습을 똑바로 봐 주기를. 자기도 모르는 자신을 발견해주기를. 그래서 지킬이 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라는 말은 그녀에게 마법의 열쇠가 된다. 그 말을 듣는 순간 그녀의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김우형씨의 지킬은 루시에게서 무엇을 보고 그녀에게 끌리게 된 걸까. 내면의 공허함? 외로움을 알고, 다른 사람과 웃고 떠드는 그 순간에 문득 느껴지는 고독, 세상에 자기 한 사람 뿐이라는 느낌을 아는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의 외로움과 공명한다. 지킬에게 엠마는 지켜주고 싶은 존재였을 것 같다. 그렇게 맑고 순수하고 자기만을 바라봐주는 존재를 어떻게 내칠 수 있을까. 내가 지킬이어도 그러지 못한다. 그 얼굴에 항상 미소만 짓기를, 가능하면 세상의 어려움을 조금 덜 느끼기를. 그러나 사람에게는 자신의 외로움을 알아줄 존재가 필요하다. 그래서인지 나는 이 지킬과 이 루시의 만남에서 처음으로, 감정의 교류를 느꼈다. 지킬은 '루시'에게 끌린다. '사랑은 오늘도 충분하고 지금에 만족하오. 지나버린 시간 또한 소중한 것.'을 부르는 지킬에게서 갈등을 느낀다. 다른 지킬들은 저 대사에서 루시를 밀어내는데, 이 지킬은 그 순간에 루시에게 조금씩 감정적으로 끌리고 있다. 그러다가 문득, '이래서는 안 되지.'라는 것을 생각하듯 등을 돌리지만, 동시에 그는 망설이고 있다. 그가 명함을 주며 말하는 '친구...내 말은 그냥, 친구'라고 할 때,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듯 하다. '친구 이상은 안 된다.'라고. 그러면서도 돌아서서 루시가 잡았던 손을 쓸어내리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루시 역시 지킬에게 조금씩 끌리고 있다. 기네비어가 그녀에게 타박을 줄 때, 그녀는 그 말을 듣지 못한다. 아니, 듣기는 듣는데 '뭐라고 말하는 구나'이상 반응하지 않는다. 소냐의 루시가 '뭐야? 어이 없어!'라고 코웃음치며, '...그냥 친구?'라고, '이게...귀여운데?'라는 듯 비웃음을 흘리는데 비해 선영씨의 루시는 그 때 열심히 그 명함을 읽어보려 노력한다. '헤에...헤 에에에...헤엔리...이..?'라고 입으로. 그리고 문득 생각을 하는 듯 하다. '이 사람이라면, 혹시...?'라고. 루시가 왜 그러는 지 알 것 같다. 이 지킬은 한 번도 루시를 진심으로 내친 적이 없고, 그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부분이기도하다. 그는 루시에게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가 루시에게 '요 며칠동안 암흑 속에 있던 내게 빛이 되어준'이라고 말 할 때, 그건 빈말이 아닌 진심이었을거라 생각한다.
루시가 집으로 찾아왔을 때, '명함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는 어쩌면 문득 '혹시 그사람인가?'라는 생각을 한 듯 하다. 같은 대사라도 인물의 감정에 따라 얼마나 느낌이 달라질 수 있는지. '아, 어서와요. .....이름이...?'라고 묻는 것이, 꼭 그녀를 다시 만나고 나서야 그녀의 이름을 듣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면 정말 레드렛에서 루시는 자신의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었구나. 그녀의 이름을 불러줄 사람들은 별로 없었을테니까 어느 순간부터 알려줄 생각도 하지 못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름에는 마법이 있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은 '나'를 바라봐준다는 느낌을 준다. 내 이름을 기억해준다는 것은 어떤 것보다 나를 기억해주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준다. 그래서 루시가 그렇게 절박하게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지도 모르겠다.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선량함, 상냥함, 따뜻한 손길
내 몸을 감싸네
인자함, 친절함, 몰랐던 느낌
그에겐 어울려
사랑에 빠질 것 같아, 난 나른해져.
이런 지킬이기에 왜 루시가 그렇게 지킬에게 자연스럽게 끌리게 되었는지 알겠더라. 그는 자기에게 처음으로 다정하게 대해 준 사람이었고, 계속해서 그녀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밀어내려고 하지만, 진심은 그게 아니라는 것이 옆에서 보는 내 눈에도 고스란히 전달되어 온다. 다른 지킬들은 루시를 밀어낸다. '.....잘 가요.'라는 말로 벽을 쌓고 그녀에게 다가오지 말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지킬은 루시를 붙잡고 싶어한다. 그만이 '저어........조심해서.....잘 가요.'라고 말한다. 그는 붙잡고 싶어한다. 루시가 가지 않도록. 하지만 동시에 이 지킬은 그녀에게 깊은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루시가 하이드를 언급할 때, 다른 지킬은 속으로 의심하고, 경계한다. '이 여자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왜 나를 찾아온 거지?'라고. 그런데 이미 이 지킬은 그 순간 '내가 그녀를 상청입혔구나. 다름아닌 내가'라며 깊이 죄책감을 느낀다. 그녀를 어루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부드럽다. 그녀가 그를 원하는 것 만큼 그도 그녀를 원한다. 외로운 두 사람의 슬픈 키스. 그리고 문득 이래서는 안 되다며 그녀를 밀어내지만, 그는 그 여운에 당혹스러워한다. 입술을 어루만지는 그 동작이 '내가, 도대체 무슨 짓을?'이라고 생각하기 보다는 '......이게 무슨 느낌이지?'라고 느끼고 있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녀를 보냄으로써 그녀를 보호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하이드인 자신으로부터. '저어...'라는 망설임과 '조심해요' 라는 말에 그 마음이 짙게 느껴진다. 왜 그런 때 있지 않던가. 하고 싶은 말은 너무 많고 걱정도 많이 되는데 정작 나오는 말이 '건강하세요. 감기 조심하고...'라는 말 밖에 없을 때. 뭐라고 말 하고 싶은 건 많은데, 결국 나오는 말은 '힘 내...'라는 말 밖에 없을 때. 그래서 루시가 지킬에 대한 마음을 노래하는 '당신이라면(Someone Like You)'가 설득력을 가진다. 드디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났다고, 그렇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드디어 자신을 창녀로 대하는 사람이 아니라, '루시'로 대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말이다.
이 지킬은 더없이 인간적이다. 그래서 난 처음으로 지킬에게 내 모습을 겹쳐 볼 수 있었다. 약하고 속으로는 불안정하면서도 겉으로는 침착하고, 강하고, 감정을 통제하는 지킬. 약한 자신을 싫어하는 지킬. 두려움을 느끼는 지킬. 그런 지킬에게서 나타난 하이드는, 악도 아니었고 짐승도 아니었고, 미쳐있지도 않았다. 지킬이 지킬일 때 선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의 하이드 역시 하이드일 때도 침착하고 이성적이고 신사적이었다. 그의 하이드는 지킬이 바라던 모습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누구도 제약할 수 없는 당당함. 저 하이드를 보면서 '미쳤다'거나 '짐승'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안타깝다. 지킬은 좀더 자신을 믿었어도 되었을 거라고. 저 하이드는 지극히 정상이다. 자정, 모든 게 정상. 이런 하이드가 있을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지킬과 하이드는 같은 사람이니까. 하이드에게는 제약이 없다. 그게 사회의 법이든, 도덕이든, 지킬 자신이 만든 법이든. 하이드는 자신의 기준으로 세상의 질서를 다시 세운다. 지킬은 자기 자신을 위해 하이드가 필요하고, 하이드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지킬이 필요하다. 하이드는 지킬을 위해 존재하고, 지킬의 숨겨진 내면을 드러낸다. 하이드가 루시를 찾아간 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루시가 재수 없어서 하이드의 눈에 띈 것이 아니고 루시여야만 했다. 지킬이 속으로 바라던 대상이었기에, 하이드는 그녀를 갈망하고, 또 지킬에게 질투를 느낀다. 루시에게 지킬이 보낸 편지를 발견했을 때, 그는 나직이 혀를 찬다.
시끄러워 죽겠구만, 뭐라 지껄여.
가소로와, 승리한다고?
듣다보니 안쓰러워, 니가 불쌍해.
넌 나를 못 벗어나, 절대.
듣다보니 안쓰러워, 개소리 마라!
이건 꿈이 아냐, 절대로.
나는 너를 위해 있어, 착각하지 마!
니가 죽어도 나는 살아!
넌 절대 날 죽여 없앨 수 있어.
날마다 넌 나를 숭배해! 이 지킬은 무척이나 강한 사람이었다. 엠마를 갈망하고, 기대고 싶고, 잡고 싶어하면서, 입으로는 정말 애타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녀의 손을 향해 손을 뻗다가도 자신의 옷깃만 꾹 부여잡는다. 그 짐은 온전히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 할 짐이기에. 어터슨마저 자신을 받아주지 못할 것을 이미 예상하고,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난 그런 그를 미워할 수가 없다. 마지막에 결혼식을 올리는 지킬을 보며 그 동안 참 못됐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그를 통제하지도 못한 상태로 어떻게 자신이 사랑하는 상대방에게까지 그 짐을 안기려고 한단 말인가. 앞으로 엠마의 미래는 어쩌라고. 그런데 이 지킬의 결혼을 바라보면서는 그냥 이대로 정말 무사하기를, 이대로 그냥 행복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어터슨의 칼에 뛰어들고 난 이후 눈물을 글썽이는 어터슨의 뺨을 쓸고 어깨를 두 번 토닥이고 나서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죽어 간 지킬의 죽음 앞에, 처음으로 난 지킬을 바라보며 눈물을 글썽였다. 어린 신부의 품에 안겨 죽어간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 한 이야기보다 못다한 이야기가 많지만 일단 여기까지. 여기서 끝을 내지 못하면 더 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