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7.4, 대학로 : 낯익은 공간에서 낯설음을 발견할 수 있을 때, 익숙하던 골목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 이방의 향기를 맡을 때, 그 순간 그 사람은 일상 속에서 길 잃은 여행자가 된다. 내가 사랑하는 이 거리, 두 달만에 밟아본 이 거리는 나의 기억속 모습 그대로이기도 했고, 마치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낯선 도시의 길 같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거리. 날 키워주고 날 울고 웃게 한 이 거리. 아무런 약속도 없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문득 찾고 싶은 거리가 있다는 것은 하나의 축복일런지도 모른다. 지하철을 타고, '혜화'라는 역에 내리는 순간 벌써 마음은 익숙한 공기에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서울의 다른 거리에 비해 빼어나게 예쁘지도 않고, 서울의 다른 거리와 크게 다르지도 않은, 그저 이런저런 체인점들이 모여있는 거리일지 몰라도 내게 이 거리는 다른 어떤 여행지보다 설렘을 주는 공간이다. 대학로 탐방의 묘미는 골목골목을 돌아가며 작은 보물들을 찾는 것이다. 큰 길만 따라가도 적당한 음식점이나 카페가 늘어서 있는 곳이 이곳이지만, 그렇게 갈 수 있는 곳들을 일부러 굽이굽이 골목을 돌아가는 재미는 꽤 쏠쏠하다. 딱히 약속이 없으니 시간에 쫒길 일 없고, 특별한 목적지가 없으니 괜히 이곳저곳을 둘러보게 된다. '어? 여기 이런 카페가 있었네?' '여기 이런 극장이 있었단 말이야?' 호기심어린 눈으로 볼 때, 거리는 비소로 자신이 품고 있던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골목은 이야기들을 품고 있다. 작은 소극장들을 지나치며 이 안에서 지금 어떤 꿈들이 잠자고 있을까를 상상해보기도 하고 고시원 살던 시절 종종 들르던 팬시점에서 시간을 보내보기도 한다. 언제나 이곳은 아가씨들을 유혹하는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신기한 용도의 물건들이 잔뜩이라 시간을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다. 대학로 연습실 앞에 앉아서 음료수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있는 두 외국인들을 보며 미소짓기도 하고, 내가 전에 살던 고시원 앞 의자에 늘어져 앉아 담배를 태우는 할아버지를 보며 혼자서 싱긋 웃기도 한다. 이런 골목탐방의 또 다른 즐거움은 어쩐지 이 거리에 정통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혼자서 뿌듯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배가 좀 출출해져 전에 D님과 함께 온 일본 덮밥집을 찾아가본다. 입안 가득 퍼지는, 맛이 뚝뚝 흘러내리는 덮밥을 우물거리며 배고픔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따뜻하고 두둑하게 채워주는 온기에 행복에 겨워 부르르, 작게 떤다. '어디로 갈까?'라고 생각하며 게으르게 방황하는 사이 어서 결정하라고 재촉이라도 하듯, 툭, 투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알았으니까 조금만 기다려줘!'라고 비명을 지르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카페로 달음질친다. 그 새 성급한 빗방울은 후두두둑 떨어져내리고 간신히 카페에 뛰어들어가 헉, 헉 숨을 고르고 자리를 정하는 사이 장난끼 많은 빗방울은 깜짝 쇼라도 하듯, 땅 위로 쏟아져내린다. 마치 사람들을 놀래켜 주고 싶어하듯.
내가 사랑하는 M카페는 대학로 중심에서 크게 벗어난 곳에 있지 않는데도 이상하게 사람이 없는 곳이다. 사실 어떻게 장사를 하는지가 신비할 정도로. 이 카페는 날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는데,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심지어는 어디나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시즌인 크리스마스에조차도 사람들이 없이 한적한 곳이다. 그러면서도 무척 내부가 예쁘고 클래식이 잔잔히 흐르는데다가 어떤 의자에 앉아도 편안하게 등을 기댈 수 있어서 누구든 자신있게 데리고 갈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만의 공간으로 살짝 숨겨두고 싶은 공간이기도 하다. 특이하게도 이 곳은 흡션실이 너무 예쁘게 꾸며져 있어서 비흡연자인 내가 괜시리 억울해지는 곳이기도 하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창에서 살짝 빗겨난 곳인데, 이 곳에서 바라보는 창 밖 풍경은 참 아름다워서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게 만든다. 어쩌면 내가 이 창을 통해 보는 것은 단지 창 밖의 풍경이 아니라 창을 통해 바라보는 내 마음일런지도 모른다. 이 창을 통해서라면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붉기만 한 벽과 나무 한 그루가 그렇게도 멋진 풍경처럼 보이니 말이다. 이 곳에서는 음악으로 나를 외부 공간과 차단할 필요가 없다. 그러기에 이 카페 안에 울리는 음악, 카페의 분위기가 너무 다정하고 따스하니까. 거센 빗소리에 섞여 들리는 리베르탱고의 선율, 입 안에 쌉싸름하게 퍼지는 차의 향기에 어쩐지 가벼운 취기가 오르는 듯하다.
거리에게 물었다. '우리나라 도시에는 참 볼 게 없어. 어디 가나 비슷비슷한 상점이 비슷비슷하게 늘어 있을 뿐이야. 외국인들이 서울에서 한국을 느낄 수나 있을까? 넌 도대체 뭘 보여줄 수 있지?' 그러자 거리가 대답했다. '난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어. 네가 이 곳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떠울리게 해 줄 수 있고, 이 거리에서 다시 만들어나갈 추억들을 보여줄 수 있지. 네가 내 위에서 보낸 시간들이 나를 만들고, 내가 너와 함께한 시간들이 이야기를 만들고, 그게 나를 특별하게 해. 그거면 충분하지 않아?'
거리의 말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