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어가 사고방식을 결정한다'는 말을 믿는다. 그리고 사고방식이 사람을 결정한다면, '언어가 사람을 결정한다'는 말은 결코 비약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런 언어는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나고 한국에서 자라는 걸 선택할 수 없었듯, 한국어는 내가 원튼 원치 않튼 내 first-language가 되었고, 난 그 '한국어'의 영향을 짙게 받고 있다. 한 나라의 역사와 문화가 집결된 건 다른 무엇보다 '언어'이며, 언어를 배운다는 건 단순히 의사소통의 도구를 배운다기보다는 그 언어 속에 배어 있는 문화를 배운다는 것일 터이다. 한국어의 특징 중 하나는 역시 존대말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독일어에도 일본어에도 '존대'를 위한 표현은 있지만 한국어처럼 세세하게 존칭어가 정해져 있지는 않다.
방금 전에
폴리클님의 글을 읽으면서 저 '언어'라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생각했기 때문에 조금 주절주절 써 보려고 한다. 실제로 폴리클님의 글과 같은 일을 주변에서 왕왕본다. 나만해도 저런 비슷한 경우가 있기도 했고. 학교 다닐 때는 같은 학번이긴 했지만 나이가 많아서 '언니'라 부르며 존대하던 A가 나보다 늦게 입사하면서 A는 입사 연차가 높은 B에게 존대를 하게 되었다. 그런데 B와 나는 입사를 같은 시기에 했기 때문에 말을 트고 지낸다. A와 B, B와 나, 나와 A가 각각 만날 때는 문제가 없지만 세 명이 모이게 되면 조금 분위기가 묘해진다. B와 내가 평어를 사용하고 A가 B에게 존대말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내가 A에게 존대말을 하기가 난감해지는 건데, 이럴 경우 해결책은 1)A가 내게 말을 놓으라고 한다/ 2) B가 A에게 말을 놓으라고 한다/ 3) 모두가 말을 트기로 한다/ 4) 모두가 존대말을 사용한다, 정도가 될 수 있다. 보통 (4)로 가는 경우는 드물고, (1)이나 (2)는 문제가 여전히 존재한다는 점에서 (3)으로 가는 경우가 많다. '사회에 나오면 위아래 3년 정도는 친구지'라는 말로.
자, 바로 여기부터가 굉장히 재미있다. 위와 같은 상황에서 내가 먼저 A에게, A가 먼저 B에게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 서로 말 놓죠?'라는 말을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말하지 못할 것까지야 없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지만 실제로 서로 눈치를 보고 조용히 하거나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말을 놓자는 제안을 꺼내도 저런 경우 '우리 서로 말 놓을까?'로 해결되는 게 아니라 A가 먼저 내게 '이카야, 그냥 말 놔'라고 하게 되고, 이어서 B도 A에게 'A야 그럼 너도 말 놔.' 식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더라. 그러니까 그거지. '존대를 받는 사람'이 '존대를 하는' 사람에게 말을 놓으라고 '제안'을 하기 전에는 존대를 하는 쪽에서 먼저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 말 틀까?'라는 말을 하기는 어렵다는 것. 무의식중에 사용하는 언어는 그렇게 역학관계를 형성한다. 실제로 신입 교육 때 들은 말 중, 고객이나 타 부서에 '저자세'로 나가야 하는 경우라도 절대 '미안하지만'이나 '죄송하지만'이라는 말로 운을 떼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 실제로는 고객(보통 환자)의 실수나 지식부족으로 인한 상황이라고 해도 그 말을 듣는 순간 '아, 저 쪽이 잘못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는 것. 대신 '실례합니다만'이라고 운을 떼는 것이 좋다고 한다. 실제로 '죄송하지만'을 사용하다가 '아까 미안하다고 했어, 안 했어'라는 사람에게 걸려서 고생하는 동료를 본 적도 있고.
온라인 세계가 재미있는 것은 아무리 어린 사람에게라도 서로 허락하기 전에는 존대말을 사용한다는 것이 아닐까. 오프라인 세계에서 만났다면 나이와 환경이 달라서 동등하게 대화할 수 없는 사람간에도 같은 조건에서 생각을 교환하는 진정한 '평등'이 어느 정도 구현된다. '언어'의 힘이 극대화되는 이 세계에서는 어떻게 언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사람의 인상이 결정되고 그 사람이 정의된다. 또한 그 언어에 따라 권력구조가 결정되기도 한다. 아무리 소심한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언어에 따라 온라인 세계에서는 더없이 카리스마 넘치는 사람이 될 수도 있고, 동시에 실제 세계에서는 사람들을 벌벌 떨게 할 만한 힘을 가진 사람이라도 언어의 세계에서는 깊이 없는 얄팍한 사람일 수도 있다.
정말이지 언어란, 알면 알수록 재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