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지옥설계도 - 각인된 기억의 편린 보고듣고(감상)

지옥설계도
- 이인화 지음 / 해냄 출판

 : 이 책은 알라딘 신간평가단 12기로 선정된 이후 처음으로 작성하는 도서 리뷰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저는 도입부가 지루하거나 취향이 아닌 것 같으면 과감하게 책을 덮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직장인이 된 이후 생긴 버릇입니다. 늘 시간은 없고, 읽고 싶은 책은 많으니 무슨 계기가 있다거나 선물을 받았다거나 추천을 받은 책이 아니라면, 읽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는데도 계속해서 책을 붙들고 있는 일은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렇게 놓치게 된 좋은 책이 분명 여럿 있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재미를 느끼지도 못할 것 같은데 계속해서 책을 붙잡고 있기에 제 시간은 너무나 한정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직장인에게 놀 시간은 부족하고 그나마 그 안에서 '독서'라는, 정신력과 시간이 많이 드는 활동에 소비할 시간은 더더욱이나 부족하니 말입니다. 그래서 이 책이 제가 알라딘 신간평가단으로 활동을 시작하며 '읽어야만'했던 책이라는 점이 중요해집니다. 총 3부로 된 책의 1부가 끝나고 2부가 시작된 이후에도 전 이 책이 별로 재미있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12월 초, 이 책을 추천한 사람 중 하나였고, 그래서 먼저 도착한 '여울물소리'보다도 이 책을 먼저 손에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당시 제가 쓴 추천문구는 이렇습니다. '가상과 현실의 조화를 그려냈다고 하는 이 소설은 무엇보다 소설을 읽는 재마 하나만큼은 절대 보장해 줄 것 같습니다. (중략) 줄거리 만으로는 자칫 평범한 사건 해결물 같지만, 설정을 보면 이런 설정으로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흥미진진해집니다. 경험 상으로, 이런 이야기는 대박이거나 혹은 평균 이하거나 둘 중 하나인 경우가 많던데, 이 책은 어느 쪽일까요?' 전 도대체 어떤 줄거리를 읽고 이런 추천평(?)을 썼는지 미스테리입니다. 각종 온라인 서점에 소개된 줄거리는 황당하기 그지 없거든요. 대구의 한 호텔에서 살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처음에는 단순한 살인사건으로 보이는 이 사건 뒤에는 보통 사람을 뛰어넘는 존재인 '강화인간'과 그들의 초국가걱 조직인 '공생당'이 있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전혀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는 것입니다. 버젓이 나와 있는 이 줄거리를 제가 미처 보지 못하고 그저 '가상세계'와 '현실'의 접목 정도로만 파악했던건지, 아니면 보고도 까먹었던건지, 저는 이 소설이 일종의 현대적 추리소설이라고 생각하며 읽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생판 다른 소설이었고, 그래서 제가 느낀 것은 당혹감이었습니다. 갑자기 강화인간이니 공생당이니 하는 허무맹랑한 이야기가 펼쳐졌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2부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저는 정신없이 속도를 올려 책을 읽기 시작했고, 결국 이렇게 하얗게 밤을 지새우고 곧바로 리뷰를 쓰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기 시작한 지금은 새벽 4시 반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전환점이야말로 작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어느 책이든 그 책에 대한 정보가 많을 수록 더 많이 보게 되고 더 많이 이해하게 됩니다. 이 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영화도 스포일러를 당하지 않기 위해 줄거리조차도 모르고 가는 것을 가장 선호하는 전, 책에 대해서는 그게 더 심해서 느낌이 오는 책을 골라 작가에 대해서도 줄거리에 대해서도 모르고 접하는 것을 가장 좋아합니다만, 그래도 역시 그 책이 나온 맥락이나 상황 등을 제대로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겠죠. 

 * 이 부분부터는 치명적인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전 운이 좋게 이 책을 이해하는데 유리한 입장에 있었습니다. 제가 좀 쓸데없이 문어발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온라인 게임을 전혀 즐기지 않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중학교 때에는 게임을 꽤 즐겼고, 어쩌다보니 프로게이머 1세대의 이야기를 대충 알고 있고, (무료로 체험할 수 있는 기간동안만 한 것이었지만) 재미로 리니지를 잠깐 해 본 적이 있으며, 우연한 기회로 바츠 해방전쟁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이야기를 굉장히 재미있게 읽었으며, 또한 놀라워한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앞의 세 경험은 차치하고서라도 바츠 해방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알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 책은 다름아닌 바츠 해방전쟁에 대한 오마쥬이고, 헌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책에는 크게 두 개의 사건이 나옵니다. 먼저 '현실세계'라고 불리는 공간에서 일어난 대구에서의 살인사건과 그 사건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사건의 범인을 찾기 위해 '각성자'라고 불리는 준경이 가상의 세계인 '인페르노 나인(이하 '인페르노')'으로 내려가 경험하는 사건이 그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것처럼 보이는 두 세계는 묘하게 닮아있습니다. 닮은 게 당연합니다. 바츠 해방전쟁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2부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저 인페르노가 일종의 게임 속 공간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한 암시는 노골적으로 소설 속에 흩어져 있습니다. 주요 인물인 이유진과 준경이 원래 PC방 죽돌이었고, 자연스레 이 둘이 처음으로 만난 곳이 '길드워'라는 온라인 게임 속 공간이었으며, 이들이 강화인간이 된 이후로도 길드워를 일종의 카톡이나 메신저처럼 사용했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인페르노의 '설계도'에 해당하는 이야기에서는 노골적으로 '프로게이머'에 대한 이야기며 임요환에서 따온 게 분명한 '요한 명인'부터 '스타크래프트', '리니지', '젤다의 전설', '디아블로', '스타크래프트 2'까지 수많은 온라인 게임들이 등장합니다. 상상의 산물인 게임 속의 이야기는 그 이야기의 창조자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 반영하게 되는 건 당연한 일일테니, 이유진이 만든 일종의 게임 속 사회라 할 수 있는 인페르노가 현실세계의 역사를 반영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인페르노 안에서는 늘 전쟁이 있는 것도, 현실을 닮아 있습니다. 소설의 앞부분에서 세계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며, 전쟁이 사라진 듯 보이는 현재에도 전쟁은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도 이를 위한 장치인 듯 보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말하자면, 현실의 세계는 게임 속의 세계를 반영한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야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과 게임 속 '가상 세계'가 다른 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소설 속에서 인페르노를 포함한 최면 세계는 그 최면의 창조자가 만든 설계를 벗어날 수 없는 한계를 가진 세계로 설정됩니다. 이 소설에서의 '최면'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의 이야기가 제공되는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그 기원과 끝만이 정해진 하나의 '틀'을 제공하는 것 뿐이라고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건 최면에 걸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 자신입니다. 하지만 그 시작과 끝은 정해져있고, 아무리 그 안의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고 한들, 전체적인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이라고 다를까요. 아무리 우리가 발버둥쳐도 한 번 구축되어있는 시스템을 바꾸기란 여간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가 가상세계를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게 큰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지점에서 바츠 해방전쟁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바츠 해방전쟁은 리니지2의 서버 중 하나인 바츠에서 벌어진 전쟁을 말합니다. 온라인 게임에서의 전쟁이야 지금도 수없이 반복되었고, 지금도 반복되고, 앞으로도 계속될 일인만큼 특별할 게 없겠지만, 그 중에서도 바츠 해방전쟁이 특별한 것은 서로 일면식도, 관계도 없던, 힘 없는 다수의 사람들이 절대 우위를 가지고 있던 세력에 대항하여 일어난 전쟁이었기 때문입니다. 가상 세계에서 일어난 일종의 민중 혁명이자, 그 게임의 시스템 상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사건이었고, 동시에 온라인 게임의 사회가 일종의 사회성을 가진 하나의 사회라는 것을 드러낸 사건이기도 했지요. 이 소설은 이 바츠 해방전쟁에 참가했던 작가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구축한 바츠 해방전쟁의 연대기입니다. 그래서 인페르노 역사에 길이 남게 되는 '라우엔 대회전'의 불씨가 잠잠히 타오르고 그 절정을 맞게 되는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이 소설의 호흡은 가빠지고 정신없이 독자를 끌어당기게 됩니다. 이 '라우엔 대회전'의 결말은 다분히 우연적이고, 그래서 어이없기도 하지만, 사뭇 감동적입니다. 실제로 바츠 해방전쟁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이후 인페르노의 세계 속의 준경(던컨)가 말년에 읊조리는 말은 이후 바츠 해방전쟁의 변질과 결말을 떠올리게 하기도 합니다. 



 - 같은 사건, 다른 시선

 "바츠 해방전의 의의는 온라인 게임이라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현실로 돌아가버리면 그만인 그 세상에서 자신들을 폭압적으로 억누르는 '누군가'를 쓰러트리고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를 되찾기 위해 일으킨 최초의 민주주의적 가치를 가상 공간에 구현해낸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스스로의 분열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지만 내복단으로, 혹은 바츠 해방군의 일원이나 DK혈맹원 중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한 사람들에게, 실패로 끝난 그 날의 혁명은 이후에 일어날 혁명이 비춰봐야 할 거울이며 같은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본보기로써 영원히 의미있는 투쟁의 역사에 첫 페이지를 장식할 겁니다." - 슈리아 님의 '바츠 해방전- 온라인 게임에서 울려퍼지는 자유의 외침'


 저는 이 문장이 '바츠 해방전쟁'에 대한 가장 정확한 요약이며, 동시에 이 소설이 말하고자 했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바츠 해방전쟁은 '내복단'으로 지칭되는 민중들이 'DK 혈맹'으로 상징되는 기득권에 맞선, 게임 시스템 상 있을 수 없었던 전쟁 이야기입니다.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뒀으나, 이후 실패로 끝났다는 것까지도 현실의 사회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 이야기를 들으며 현실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 결말까지도 수없이 반복되어 온 이야기들과 다르지 않습니다. 

  어떠한 역사적 사건은 그 시대, 그 사건이 벌어진 공간의 사람들에게 크든 작든 영향을 주게 됩니다. 어떤 이에게는 어렴풋한 기억 정도로 남겠지만, 어떤 이에게는 일생을 뒤흔드는 사건이 되기도 합니다. 게임 속에서 벌어진 가상의 전쟁이, 그 전쟁에 참가한 한 사람의 작가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고, 이후 디지털미디어학부를 창설하고 이런 소설을 쓰게 할 정도로 말입니다. 

 누군가는 하나의 사건에서 그 실패만을 기억할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한 때의 승리에 큰 의의를 두겠지요. 같은 사건이 누군가에게는 결국 실패로 끝났다는 절망을 의미할지도 모르겠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다음 번 승리를 위한 가능성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이인화 작가는 대부분의 혁명이 어떤 결말로 끝나는지도 상기시키는 동시에 그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적어도 절망과 체념 속에 고개를 돌리는 것이 아닌, 희망을 가져야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실패로 끝난 전쟁을 이야기하며, 동시에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전 그 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절망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지만, 희망은 적어도 하나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이야말로 시스템이라는 지옥설계도를 바꿀 수 있는 힘이 되기 떄문입니다.

+) 덧 : 이야기의 결말부에 이르고, 책을 다 읽고 나면, 개인적으로는 초반에 그냥 넘겼던 공생당의 은유에 묘한 반감을 가지게 되더군요. 그 부분만큼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습니다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점도 우리의 역사의 분명한 일부니까요. 다만, 그 은유 때문에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전부 왜곡될 수 있을 것 같아 살짝 안타까움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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